나의 수필세계 167

귀신잡던 시절이여!

귀신 잡는 해병이 된 친구 철이. 어느 날 갑자기 청룡부대원으로 선발되어 월남에 파병되었다. 손꼽아보니 53년 전의 일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국의 정글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친구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길고 긴 사연을 적어 빨간색과 파란색 테두리가 있는 항공 우편용 봉투에 접어 넣어 우체국으로 가고는 했다. 내용이라 해봤자 무지하게 덥다는 그곳에서 몸성히 지내다가 무사히 귀국하길 바란다는 상투적인 말에 주변의 분위기를 양념으로 버무린 것이 전부였다. 며칠 후 날아온 답장은 아직은 살아있다는 절박함이었다. 더러는 우정과 진심이 스며있는 긴 편지에 어깨가 잔뜩 올라갔다는 말을 앞세우고 헬기가 하늘을 찢는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가는 풍경에 가까이서 ..

나의 수필세계 2023.01.21

다음에는 어디로?

원주, 춘천을 거쳐 인제와 강릉까지 돌아오는 3박4일 강원도의 가을을 즐기고 온 때가 재작년이다. 친구들이 군생활 3년을 자랑하던 곳을 드디어 나도 간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남달랐다. 한 구비 돌면 맑은 물이고, 또 한 구비를 돌아나가면 바위산이 눈앞에 다가섰다. 만산을 물들이고 있는 단풍에 파묻혀 무한 힐링을 경험한 최고의 시간이었다. 지난주에는 무안, 목포, 영암을 거쳐 해남까지 내려갔다가 장흥, 벌교, 순천을 다녀왔다. 질펀하게 드러난 갯벌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작은 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풍경이었다. 눈호강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하여 장흥 삼합에 바지락과 꼬막까지 양껏 즐기면서 오감이 행복했다. 강원도에서는 강원도의 멋에 빠졌었고, 전라도에서는 남도의 맛을 만끽했던 여행길이 동영상으로 저..

나의 수필세계 2022.12.01

7학년에게 묻다

그저께 손자 녀석이 방학을 맞아 왔을 때 나는 어김없이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은근한 압박이 이면에 깔린 질문이었다. 9만리나 남은 청춘에 높은 탑 하나 세우길 기대하는 것이 잘못일까? 나의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는가? 어릴 때는 장래 희망이 대통령이나 이순신 장군과 같은 국가적 인물이었고 나이가 들면서 의사나 과학자, 교사와 같은 현실성이 고려된 것으로 바뀌었다. 가끔은 음악이나 미술 분야의 전문가는 어떨까 하다가도 운동장에서 멋진 활약을 하는 운동선수를 보면서는 저것도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멋지게 추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 더러는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더러는 시도..

나의 수필세계 2022.08.11

선생님의 봉투

지난해에 이어 올 스승의 날에도 코로나 핑계를 대며 전화로 문안 인사를 떼운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코로나도 물러가고 있는 참에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점심 식사를 모시고 싶다고 했더니 한가코 사양하신다. 식사는 그만두고 집에서 차나 한잔 마시자는 말씀을 따랐다. 자녀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가신 선생님 댁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다. 참으로 반가웠다. 엎드려 큰절을 올린 후 마주 앉았다. 살이 많이 빠진 것이 한눈에 느껴졌다.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 외에 별다른 운동도 하질 않으니 건강이 나아질 리 없는 노릇이다. 또 음성의 톤이 약간 높아진 것을 보니 청력도 못해진 듯했다. 가까이 앉아 얼굴을 쳐다보며 분명하게 말하고자 애를 썼다. 잠시 서글프다는 생각이 스쳤다. 노인의 곁을 스쳐가는 덧..

나의 수필세계 2022.08.01

풋 완두콩맛을 아세요

푸름이 짙어지는 오월이면 완두콩이 생각난다. 완두콩 푸른 들판이 눈에 어른거린다. 농사꾼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절의 완두콩이 기억의 저편에 있다가 성큼 다가선다. 아버지는 덩굴 채 뽑은 완두콩을 지게에 지고와 마당에 내려놓는다. 어머니는 그 중에서 토실토실하게 여문 낱알들을 까서 함지박을 채우고, 덜 여문 것들은 따로 모아서로 부억으로 가져간다. 아궁이에 불이 지펴지면 구수한 내음이 집안에 가득하다.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완두콩 맛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그 중에도 풋것이 맛있다. 추억은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며 그 맛은 변하지 않는다. 완두콩 맛을 떠올리며 군침을 삼킨다. 배가 고픈 계절이라서 더 그랬을까. 아내는 시장에 완두콩이 나오면 한 자루씩 사온다. 올해도 칠성시장 골목 안에 있는 단골집을 찾았다. 주..

나의 수필세계 2022.07.30

취무성

자연에 취하고 멋과 맛에 취해 오래오래 깨고 싶지 않은 취무성(醉無醒),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그 곳은 이름부터 특이했다. 단순히 호기심에 끌려 18년 전에 처음 갔었고, 그 후는 매력에 취해서 몇 번을 더 간 적이 있다. 이번은 그로부터 10년 만이다. 계절도 가을이 짙어가는 딱 이 무렵이었고, 계곡으로 들어가는 낭뜨러지 비포장 산길도 여전했다. 낙엽이 마당을 덮고 있는 빈집 돌담 사이에 서있는 늙은 감나무에는 그때처럼 잘 익은 감들이 매달려 있었다. 추억에 들뜬 기분을 달래며 도착하니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아준다. 오랜만에 만나 수인사를 나누면서 나의 눈길은 하룻밤 묵었던 처소를 뒤쫓았다. 그때는 정말 좋았다. 억새를 엮어 씌운 지붕 아래 황토벽이 그림 같았다. 장작으로 군불을 지핀 방에 날 고운 돗..

나의 수필세계 2022.01.24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갑자기 수국이 만발했던 제주도의 여름 풍경을 떠올랐다. 코로나 시국에 찌든 이맛살도 펼 겸 초겨울 제주 표정이 궁금해서 찾아갔다. 화려했던 수국은 지고 추억을 간직한 꽃대궁만 남아 바람에 쓸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국의 빈자리를 만발한 동백이 화려하게 채우고 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좋았다. 이렇게 많은 동백꽃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제주도에는 〈동백축제〉가 시작되어 있었다. 동백꽃은 붉거나 분홍이 흔하지만 흰색, 노란색 등 색깔도 여러 가지이고 애기동백, 쪽동백을 비롯하여 그 종류도 많았다. 발 아래에는 일찍 피었던 꽃잎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냥 밟고 지나가기가 미안해서 이리저리 피해서 걸어가고 싶었다. 가지에 핀 꽃과 땅에 떨어져 있는 꽃 앞에 서서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

나의 수필세계 2022.01.04

산동초

입춘절기를 지나면 머뭇거리던 봄이 겨울 강을 건너온다. 나는 강가로 나가서 냉이와 달래가 따라왔는지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하지만 내심 기다리는 것은 산동초다. 겨울내내 먹었던 김장김치에 입맛이 지쳐있는 시점에 무엇보다 산동추가 그리웠던 것이다. 내가 ‘산동초’라 부르는 이것은 유채를 비롯하여 삼동추, 월동초, 시나나빠 등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산동초는 야생배추와 야생양배추의 자연교잡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요즘은 여러 지역에서 넓은 들판을 온통 노랗게 물들여 놓고 봄의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며칠 전 친구네 밭에 갔더니 파란 이파리가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올라있었다. 밑둥을 싹뚝 오려왔다. 밥상에 올라온 산동초 겉절이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아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안에 번지는..

나의 수필세계 2021.03.22

납매를 들이다

포항 기청산농원에 꽃무릇 7만 송이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그때 납매(臘梅)를 처음 보았다. 가느다란 줄기에 제법 큼지막한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납매라는 생소한 이름과는 달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보통의 나무여서 도무지 매화나무가 연상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음력 12월을 납월(臘月)이라는데 섣달에 피는 매화라 해서 얻게 된 이름이다. 납매는 1, 2월에 노란색 작은 꽃이 핀다. 나무꽃으로는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꽃 이름에 매(梅)자가 들어있지만 실제로는 매화와는 전혀 다르다. 매화는 장미과에 속하고 납매는 녹나무과에 속한다. 꽃이 진 후 가을에 익은 붉은 열매는 발아시켜서 번식을 시키기도 하고 기름도 짜는가 하면 어린싹은 작설차로 먹기도 한다. 한겨울에 진한 향기를 내품는 꽃이 ..

나의 수필세계 2021.01.09

그분은 새벽에 왔다

지난 추석무렵 내 여덟 번 째 수필집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2014년에 낸 "감자꽃" 이후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소소담담에서 작은수필집 시리즈를 한다기애 마음을 내게 되었다. 내용이 그저 그런 것이어서 좀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표지그림과 중간 삽화를 내손으로 그린 것이어서 의미가 있다. 책을 받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새벽에 온 그분에 대하여 궁금했다고 한다. 또, 무엇보다 책이 두껍지 않아 부담이 없다는 말을 전해온다. 격려와 칭찬을 해주는 분들 모두 고맙다.

나의 수필세계 202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