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취무성

죽장 2022. 1. 24. 13:44


  자연에 취하고 멋과 맛에 취해 오래오래 깨고 싶지 않은 취무성(醉無醒),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그 곳은 이름부터 특이했다. 단순히 호기심에 끌려 18년 전에 처음 갔었고, 그 후는 매력에 취해서 몇 번을 더 간 적이 있다. 이번은 그로부터 10년 만이다. 계절도 가을이 짙어가는 딱 이 무렵이었고, 계곡으로 들어가는 낭뜨러지 비포장 산길도 여전했다. 낙엽이 마당을 덮고 있는 빈집 돌담 사이에 서있는 늙은 감나무에는 그때처럼 잘 익은 감들이 매달려 있었다.
  추억에 들뜬 기분을 달래며 도착하니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아준다. 오랜만에 만나 수인사를 나누면서 나의 눈길은 하룻밤 묵었던 처소를 뒤쫓았다. 그때는 정말 좋았다. 억새를 엮어 씌운 지붕 아래 황토벽이 그림 같았다. 장작으로 군불을 지핀 방에 날 고운 돗자리가 따스했고, 정감이 가는 시렁에 가지런히 올려진 무명이부자리가 장식의 전부였던 방. 격자문을 열고 툇마루를 내려서면 흰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마당 앞 너럭바위에는 앞산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고, 그 작은 돌 틈새에 소국이 노랗게 피어 반겨주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오래 전 그 첫인상을 기억하며 돌계단을 밟고 다가갔다. 지붕에는 볼품없는 현대식 기와가 올라가 있었고, 황톳빛 벽은 퇴색되어 있었다. 먼지 자욱한 툇마루 한 쪽에 거미줄이 쳐있어 걸터앉을 마음이 사라졌다. 너럭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온통 이끼가 주인이 되어 있었다.
  낙담하며 돌아서는데 노란 소국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코를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상큼한 향기가 존재를 확인시켜주었다. 10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맞아주었다. 너마저 없었더라면 썰렁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반가운 마음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억새지붕이 기와로 바뀌었고
황토벽에는 거미줄이 얽혀있네.
이끼 낀 너럭바위는 침묵하고
댓돌 위 정갈하던 신발은 없지만
돌 틈에 소국은 노랗게 피어
향기를 잃지 않고 맞아주네.


  주인 내외와 함께 대청마루에 앉았다. 골짜기에는 이미 가을이 한창이었다. 이사 올 때 심었던 은행나무가 노랗게 팔을 벌려 하늘을 찌르고 있다. 뜻이 귀하여 구해 심었다는 회화나무도 성년이 되어 있다. 나무들을 보니 세월의 흐름이 읽혀졌다.
  이십 년 세월이 누구에겐들 비켜갔을까. 나의 계절도 앞산을 물들이고 있는 낙엽과 같으리라. 하늘을 뒤덮을 만큼 무성했었지만 찬바람이 불면 할 일을 마친 나뭇잎처럼 낙엽되어 흩어지겠지. 앞만 보며 숨가쁘게 쫓아온 세상 뒤돌아보니 그냥 잠시 머물렀던 공간이 아니던가. 햇살드는 양지에 덧을 처놓고 숨죽이며 있던 거미가 생각난다. 저녁 늦은 시간, 중천에 뜬 달이 어깨에 내려앉고 하나 둘 낙엽이 소리내며 떨어지던 바위에 올라앉아 국화 향기에 취해 세상도 잊었던 그때를 기억 속에 남겨놓고 싶다.


  들고 있던 찻잔을 놓고 일어섰다. 기약 없는 이별의 시간이다. 또 한 십 년 후에나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주인이 취무성을 기억하라며 정성들여 키우던 옹기화분 하나를 건네준다. 낯익은 소국 한 떨기를 꺾어 함께 얹어준다. 집에 돌아와 내려놓으니 국화 향기가 따라와 있다. 화분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 취무성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가듯 소국향기도 흩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모처럼 취했던 멋과 맛에서 오래도록 깨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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