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죽장 2022. 1. 4. 11:37

  갑자기 수국이 만발했던 제주도의 여름 풍경을 떠올랐다. 코로나 시국에 찌든 이맛살도 펼 겸 초겨울 제주 표정이 궁금해서 찾아갔다. 화려했던 수국은 지고 추억을 간직한 꽃대궁만 남아 바람에 쓸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국의 빈자리를 만발한 동백이 화려하게 채우고 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좋았다. 이렇게 많은 동백꽃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제주도에는 〈동백축제〉가 시작되어 있었다.

  동백꽃은 붉거나 분홍이 흔하지만 흰색, 노란색 등 색깔도 여러 가지이고 애기동백, 쪽동백을 비롯하여 그 종류도 많았다. 발 아래에는 일찍 피었던 꽃잎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냥 밟고 지나가기가 미안해서 이리저리 피해서 걸어가고 싶었다. 가지에 핀 꽃과 땅에 떨어져 있는 꽃 앞에 서서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동백의 꽃말을 반추해본다. 얼핏 달콤한 속삭임 같은 이 꽃말에는 가슴 아픈 유래가 있다.

  한 두메 산골에 사는 청년과 소녀가 서로 사랑하여 장래를 약속하였으나 청년이 멀리 떠나야 하는 일이 생겼다. 달 밝은 봄날 저녁 동산에 올라 이별의 슬픔을 나누면서 소녀는 떠나가는 청년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돌아올 때 동백나무 열매를 가져오면 그것으로 기름을 짜서 머리를 예쁘게 치장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서 가을바람이 일고 기러기가 날기 시작했지만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기다림에 지친 소녀는 청년을 그리워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백 열매를 들고 돌아온 청년은 무덤으로 달려가 땅을 치고 통곡하였으나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소녀를 위해 구해온 동백나무 열매를 무덤 주위에 뿌리고 멀리 떠났다. 동백나무 열매에서 싹이 트고 줄기가 나와 꽃이 피어 동산을 빨갛게 뒤덮었다고 한다. 소녀와 청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꽃말을 탄생시켰다.

  동백기름은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있었다. 어머니는 5일장에 나갈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면 곱게 빗어 내린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셨다. 화장품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니 아주 귀한 미용 재료였으리라. 동백기름을 귀하게 바르셨던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이 있어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

  동백꿏을 보니 비로소 그동안 잊고 살았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나는 어머니를 잊고 살았지만 어머니는 저승에서도 이 자식을 잊지 않고 계실 것이다. 사랑한다, 그립다 하시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곁에 있는 아내에게 전해졌는가. 동백꽃 앞에서 손을 꼬옥 잡으니 더 따스하다.

  빨강 동백꽃 위에 백설이 내려앉은 풍경을 그리며 자리를 떴다. 수국이 핀 여름 제주도 좋지만 동백꽃이 있는 겨울 제주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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