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납매를 들이다

죽장 2021. 1. 9. 16:53

  포항 기청산농원에 꽃무릇 7만 송이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그때 납매(臘梅)를 처음 보았다. 가느다란 줄기에 제법 큼지막한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납매라는 생소한 이름과는 달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보통의 나무여서 도무지 매화나무가 연상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음력 12월을 납월(臘月)이라는데 섣달에 피는 매화라 해서 얻게 된 이름이다.

  납매는 1, 2월에 노란색 작은 꽃이 핀다. 나무꽃으로는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꽃 이름에 매(梅)자가 들어있지만 실제로는 매화와는 전혀 다르다. 매화는 장미과에 속하고 납매는 녹나무과에 속한다. 꽃이 진 후 가을에 익은 붉은 열매는 발아시켜서 번식을 시키기도 하고 기름도 짜는가 하면 어린싹은 작설차로 먹기도 한다. 한겨울에 진한 향기를 내품는 꽃이 핀다는 말에 나는 그만 혹하였다.

 

  납매라는 이름을 되뇌이니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 선생이 떠올랐다. 퇴계가 살았던 시기는 당쟁으로 점철된 위기의 시대였다. 매화가 겨우내 꽃봉오리에 아름답고 청진함을 가득 채우듯이 퇴계도 마음속에 맑고 바르고 밝은 정신을 채움으로써 자신을 평온하게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매화를 심고 가꾸고 대화하는 자체가 퇴계에게는 학문과 수양의 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퇴계는 도산서원에 계단식 화단을 만들어 매화를 많이 심었다. 그러나 매화는 낙동강 상류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얼어 죽었다. 그래서 혹한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재매로 심어 실내에서 키웠다. 화분에 심은 매화를 겨울이 되면 햇볕이 잘 드는 방의 창가로 옮겨 가까이했다. 관직에 나갈 때는 키우고 있던 분재매를 서울로 옮겨가 돌볼 정도로 그의 매화사랑은 지극했다.

  퇴계의 매화 사랑이 여기서 끝이라면 재미가 없다. 애잔한 러브스토리 한 토막 때문에 독특한 멋과 향기를 느끼게 된다. 퇴계가 단양군수 때 친분을 맺었던 기생 두향이가 주인공이다. 단양군수를 그만두고 떠날 때 매분을 선물한 두향은 퇴계를 재임 시절에 한 번 만난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평생 수절했다. 퇴계가 마지막 유언으로 물을 주라고 했던 매분이 두향이가 준 바로 그 매분이었다. 오늘 확인할 수는 없더라도 고위직을 지낸 퇴계와 기생 출신 두향이의 신분을 뛰어넘는 인연에 사람 냄새가 난다.

 

​  살아있는 교과서요,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이었던 퇴계의 매화였고, 이승을 떠나면서도 물을 주며 보살피라고 당부했던 매화다. 그날 기청산농원에서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를 떠올리며 매화가 아닌 납매 한 그루를 모셔왔다. 동지가 가까워 오는 오늘 베란다에 눈길을 주니 햇살 아래에서 여전히 싱싱하다. 겨울이 깊어지면 이 납매에 꽃이 피겠지. 매화를 보며 학문과 수양에 정진했고, 가끔은 눈을 들어 단양의 여인을 떠올렸던 퇴계를 생각하며 꽃이 피기를 기다릴 작정이다. 이른바 퇴계 흉내를 내볼까 한다.

  어느 날 문득 내 코 끝에 납매향이 와닿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공부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두향이 같은 인연 한 조각 지은 적이 없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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