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제발 오지 말아라.

죽장 2008. 5. 15. 17:46

 미리 연락드리지 않고 불쑥 방문할 수는 없는 일.

선생님은 전화를 받자마자 내가 말할 틈을 주질 않고 대뜸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지 말아라.”

“이제 그만 오너라.”

“지금 급한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이다.”

“집사람이 출타 중이라 곤란하다.”


나는 번번이 이런 입씨름을 한끝에 억지로 찾아뵙고는 한다.

일년에 두 번

설날과 스승의 날.


스승의 날을 앞 둔 어제도 전화를 드렸더니

더욱 황당한 말씀을 하신다.

“지금 멀리 이사를 했다. 오지 말아라”

나도 그냥 물러설 수가 없는 일.

“이사한 곳이 어디입니까?”

“이사를 하여 집안이 엉망이다”

“들어가지 않고 얼굴만 뵙고 나오겠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 오거라, 그만하자”

 

금방 전화를 끊을 자세다.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소리치듯 하소연을 한다.

“선생님,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한 것도 없는데 미안해서 그러지”


이사하셨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맞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큰 절을 올렸다.

한 것도 없는데 올해로 일흔두살이나 먹었다고 자랑하신다.

웃을 때도 그렇고, 그냥 말씀을 하실 때도 그렇지만

전신에 나타나는 연륜의 흔적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자주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뻔한 거지말을 들으시며 웃기만 하신다.

돌아오는 길, 서둘러 일어서니 뒷통수가 얼얼하다.

 

참으로 꼿꼿하신 어른.

나의 영원한 스승.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월 중순의 밤바람조차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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