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7년 1783년
세자책봉을 축하하기위한 증광감시(增廣監試)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다.
21살 정약용이 아버지 사도세자와 동갑이었음에
첫인상이 정조의 가슴 깊이 새겨졌다.
성균관에 들어간 정약용은
반제나 수석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으나
남인계열이라 벼슬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정조 13년(1789년) 3월 종7품의 희릉직장(禧陵直長)이 첫 벼슬이었고,
3년후인 16년 3월에 황문관록(弘文館錄)에 올라,
홍문관에 들어가기 위한 1차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이해 4월, 진주목사로 있던 아버지 정제원이 사망하자
광주 마재로 돌아가 여막을 짓고 거처했다.
정조는 여막살이를 하고 있는 정약용에게
부친 사도세자가 누워있는 수원성(화성)의 설계를 맡겼다.
설계도는 모두 8부분으로,
화성의 전체 크기인 분수(分數)와 재료(材料),
성을 두르는 해자인 호참(濠塹)과 성의 기초다지기인 축기(築基),
석재를 캐오는 방법인 벌석(伐石)과 길에 관한 문제인 치도(治道),
수레를 이용하는 조거(造車)와 성벽을 쌓는 성제(城制)가 그것이다.
이 때 ‘무거운 재료를 들어 올리는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하여
4만냥의 비용을 절감’한 것도 정약용 실학정신의 개가이다.
이렇게 정약용의 벼슬과 시련
그리고 빼어난 두뇌는 역사에 노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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