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아부지 생각

죽장 2006. 8. 1. 16:11

  비가 온다. 집 뒤의 연못 풍경이 궁금해져 우산을 펼쳐 들고 나갔다. 흙도, 돌도, 나무도 옷을 벗은 채로 젖으며 말이 없다. 들풀들은 젖는 것만으로 부족한지 온몸을 흔들고 있다. 오히려 싱싱해진 자태를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 다가온다.

 

  연못에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려 꽂히고 있다. 수면에 닿는 순간 빗방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동심원의 파문이 일어난다. 빗방울의 흔적이 연못에 가득한 연잎으로 다가간다. 파문에 흔들린다. 커다란 이파리 아래 숨어 있던 연꽃이 얼굴을 나타낸다. 싱거운 바람이 선 듯 불어와 치맛자락을 헤집는 통에 그만 여인의 속옷이 드러난 것 같다. 연분홍빛이다. 속살이 아닌데도 보는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연꽃은 한번 펄럭한 치마처럼 움찔하고 미동 한번 남기고 다시 제자리를 지킨다. 물방울들은 꽃에도 이파리에도 스며들지 않고 흘러내린다. 싱싱한 나무줄기가 빗줄기 너머에서 친근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개구리소리도 사라진 대지에 세상에는 온통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뿐이다. 비 오는 풍경의 한가운데 내가 서있다.

 

  그렇다.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나기가 쏟아지면 아주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달려 나가신다. 도롱이를 걸치고 삽을 찾아들고 뒷산 아래 천수답을 향해 질주를 하신다. 하늘만 바라보며 사는 삶, 한 방울의 물이라도 허투루 흘러가지 못하게 하려는 농사꾼의 몸부림이 생각난다.

 

  비에 젖는 들판은 농민들의 희망이었다. 황톳물이 콸콸거리며 논으로 흘러들면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짙은 구름 걷히면 파란하늘이 아버지의 가슴팍으로 꿈인 양 달려들었을 것이다.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들판에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아, 비 오는 날 논두렁을 내닫던 내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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