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마음의 훈장을 H에게

죽장 2006. 6. 21. 17:31
 

  아들아이가 군대 복무를 마치고 내일 제대한다고 하니, 갑자기 삼십년 전의 내 군대시절이 세월의 강을 건너 선 듯 다가선다. 첫 휴가 때의 감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줄기에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식탐을 생각하면 불룩해진 아랫배가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경부선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휴가 길, 나는 개선장군이었다. 덜커덩거리는 기차의 소음도 오페라아리아처럼 감미로웠다. 적군을 무찌르고 받은 훈장이사 없었지만 귀가 길을 앞서가는 설레임의 무게는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컸다.

 

  갖 모내기를 마친 논이며, 연두색으로 변해가는 산천이 푸른 제복과 아주 잘 어울렸다. 결코 배고프지 않는 병영생활이었는 데 먹고 싶은 것은 또 어찌 그리 많았던지 모르겠다. 홍시와 참외가 먹고 싶었다. 잘 삶아 김이 나는 고구마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마음과 몸이 편안한 사람이 호강에 받혀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지천으로 피어 있는 진달래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고, 자주 먹는 콩나물국은 한없이 식상했다. 군복 입은 나에게 있어 단 하나의 위안은 거꾸로 메달아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진리가 전부였던 시절 눈에 비친 봄 풍경의 경이로움이며,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현실감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잊지 못하는 것은 자대에 배치되던 날의 소박한 감동이다. 신병훈련소를 나설 때는 그토록 자랑스럽던 이등병 계급장이 그 날 밤에는 어둠에 묻혀 떨었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두려운 마음을 애써 감추고 위병소로 들어섰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절벽 끝에 홀로 선 듯한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 예비군복으로 갈아입은 군인이 “집이 어디냐”며 말을 걸어왔다. 긴장하고 있는 내 눈에 그 복장은 장군의 것인 양 훌륭했고, 목소리는 천사의 음성 같았다. 내일 모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고참 중의 고참 H병장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후배였다.

 

  국방부에 걸려있는 나의 시계도 돌고 돌았다. 호주머니에 든 전역통지서는 내 인생에 있어 최대의 전리품이었다. 군대시절이 젊음을 저당 잡힌 허송세월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한장의 종이 속에 담겨 있었다. 어깨를 펴고 위병소를 빠져나오면서 뒤돌아 보았다. 병영의 모습은 가진자가 느끼는 연민 그 자체였으며,  앞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바람은 후련함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난관도 헤쳐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소득이었다. 그리고 군 생활의 지침이 되었던 그 후배, 아니 그 고참병의 고마움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갔다.   

 

  이제 30년의 세월이 흘러 아들 녀석이 제대를 한단다. 내일이면 그 녀석도 위병소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나올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위병소에서 전입신고를 하던 그날, ‘걱정하지 말라,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하노라면 3년 세월도 금방’이라던 고언이 새삼스럽게 고개를 든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심어주고 떠난 H후배가 그립다. 위병소를 마지막으로 나서면서 느낀 연민은 내 그리움이며, 그날의 자신감은 오늘 내 삶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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