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당쟁의 역사에서 배운다(독후감)

죽장 2006. 6. 2. 10:54
 당쟁의 역사에서 배운다


  조선 왕 4명 중 1명이 독살되었다. 흥미롭기 보다는 끔직한 사실이다. 임금을 정점으로 한 권력의 심장부에서의 얽히고설킨 사건과 사건에 몰입되어 거침없이 읽었지만 얻은 결론은 끝없는 인간의 탐욕의 무모함이다. 어떤 일에나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임금이 산하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데에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다. 그것은 부끄럽게도 권력을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빼앗긴 정권을 탈취하려는 인간의 마음이 전부였던 것이다.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의 공통적인 특색은 독살설의 배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하였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는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재위 8개월의 단명으로 죽은 12대 인종, 임진왜란을 맞아 서울을 버리고 명나라도 도망가려다 압록강에서 멈춘 14대 선조, 19대 숙종의 할아버지 17대 효종과 아버지 18대 현종 그리고 숙종의 아들 20대 경종, 그리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라 왕위에 오른 22대 정조, 오백년 사직에 종지부를 찍은 26대 고종이 모두 독살설에 휘말린 임금들이다.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온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왕위계승 1순위였으나 그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다.

 

  사건의 원인이자 결과가 된 배경을 살펴본다. 1506년 사대부들은 조선조 최초로 신하들이 임금을 끌어내리는 쿠데타인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추대하였다. 이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임금이 바로 인종이다. 중종말기에 조정의 신하들은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차기 임금을 미는 불안한 게임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고 이 틈바구니에서 인조가 죽었다.

  왜란을 겪은 14대 선조도 그랬다. 재위 40년 가을 들어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세자에게 전위하려고 하자, 영창대군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세력이 따르지 않았고, 대북파인 공조참판 정인홍은 유영경을 공격하는 등 후임 책봉을 두고 소북파와 대북파의 다툼이 계속되는 가운데 선조는 재위 41년 1월 광해군에게 3살 난 영창대군을 부탁하면서 삶을 마쳤다.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의 일이다. 나이 스물여섯의 소현세자는 열아홉 살 난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춥고 먼 불모의 길에 올랐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성리학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고 귀국하는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는 조선은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귀국한 해 4월 23일 병석에 누었고 3일만인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다. 오로지 북벌만이 왕위계승을 정당화시켜준다고 믿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군사력이라 생각했다. 북벌을 둘러싸고 사대부들과 마찰하면서 정정은 불안해졌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에게 북벌군주 효종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던 효종은 40살 장년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예송논쟁의 중심에 섰던 현종이다.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그 추종세력을 정연한 논리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논쟁으로 사실상 국왕의 위에 있던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등용되었다. 현종은 서인들이 임금이 아니라 자기 당의 영수인 송시열을 더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빈자리를 남인들로 채우려는 이른바 집권당의 교체를 시도하던 중 재위 15년 8월 18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720년 장장 46년을 집권한 숙종이 6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환국과 재환국, 폐출과 복위로 점철된 한 시대가 갔지만 이어 즉위한 임금은 어머니 희빈 장씨가 비명에 가는 것을 목격한 경종이었다. 파란의 조짐을 잉태하고 있었음이 너무나 당연했다. 노론이 사력을 다해 쫓아내려했던 경종이 즉위했으니 그간 탄압받던 소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경종의 죽음을 놓고 당연히 반대파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리게 됨은 물론이다.

  경종이 소론 군주였다면 다음 임금 영조는 노론 군주였다.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는 것을 목도한 정조는 25살 장년이 되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노론대신들이 공포에 휩싸인 것은 물론이다. 국왕은 조선의 국왕이 아니라 한 당파의 당인으로만 인정되었고, 정조와 노론은 이미 군신관계가 아니라 정적관계였다. 정조는 이런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남인들이 성장하기만을 기대리던 정조가 갑자기 죽은 것이다.

  고종은 자신의 재위 기간 중 500년 사직이 망한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리던 중 해외 망명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현되기 직전인 1919년에 급서하였다. 망명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망명정보를 입수한 일본에 의해서 독살된 것이라 증언하고 있다.


  임금 독살! 이 요동치는 역사의 물굽이마다 당쟁이라는 핵심 키워드가 깔려 있다. 최근 「5·31」자치단체장 등의 선거를 한바탕 치루면서 여야 정당 간에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있는 터라 조선왕조시대 치열했던 당파싸움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정당 간 사활을 걸고 다투었던 싸움은 곧 국민과 국가의 사활로 직결될 것이기에 말이다. 지구촌에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여기서 주저앉고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우리가 서 있는 우리다.

  역사는 당파끼리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가치 있는 사안을 두고 다툰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현종의 나이 18살 때인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를 따라 3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차자의 예를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고, 15년 후의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황후가 승하했을 때 장자부의 예에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부의 예에 따라 9개월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그 한 예이다.

  당파의 이합집산이 연속되면서 어제의 동지라 할지라도 오늘 갈라지면 한 하늘 아래서 공존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숙종 대를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고 그 정쟁의 결과 서인이 승리했다. 집권 100여년의 서인의 몸집이 비대해져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자체 분열한 것도 숙종 때였다. 같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후 서로 대립했듯이 노론과 소론도 대립했다. 남인과 싸울 때는 같은 서인이었으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울 때는 오히려 소론이 남인 편을 들 정도로 한번 갈라지면 적이었다. 얼마나 자주 정권이 바뀌었는가 하면, 기사환국(1689년)으로 마침내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다시 5년 후인 숙종 20년에 서인들이 남인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갑술환국이 일어났으니, 이 같은 패거리 우선의 사회문화가 그 다른 예이다.

  집권이 정의가 되고 실권이 불의가 되는 당쟁의 시대. 공동선의 추구보다는 소속집단의 이익에 모든 것을 걸었던 소인배들. 조선의 임금 1/4이 독살된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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