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회갑잔칫날

죽장 2006. 4. 25. 17:49

  한나절이 지나 마을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북이며, 장구소리가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신호로 집안 가득 흥이 일기 시작한다. 체면을 차리느라 몇 번이나 손사래를 내젖던 사돈어른도 마침내 일어섰다. 장롱에서 갓 꺼내 입은 듯한 모시두루마기가 눈부시다. 덩실덩실 마을 사람들의 춤사위가 어울어진다. 삽짝 밖에서 놀고 있던 까까머리 아이들도 모여들었다. 아랫도리를 몽땅 벗은 꼬마도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버지의 회갑잔치 날이다.

 

  추억열차가 시공을 뚫고 달려든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았던 때의 초가지붕이 말끔하다. 맨 동쪽의 부엌에서는 여전히 음식냄새가 나는 듯하다. 활짝 열린 안방문에 창호지가 곱게 발려있는가 하면, 바깥을 내다보기 위해 붙여둔 유리조각이 붙어 있다. 기둥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교내백일장에서 내가 받은 상장이 걸려 있다. 그 옆이 청마루이다. 안어른들은 마당에 내려서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다.

 

  집안을 뒤져서 겨우 찾아낸 한 장의 사진이다. 마당 가운데 모자 없이 한복 입고 돌아서 있는 노인이 내 아버지다. 왼쪽 끝에 넥타이 매고 양복 입은 청년이 지금 나이 일흔의 고종사촌 형이다. 36년 전인 1970년의 동짓달 초이렛날은 아주 맑았다.

 

  빛 바랜 흑백사진을 바라보니 마음속에만 남아있던 내 유년의 그림이 다가선다. 집은 초가지붕, 흙벽돌벽, 창호지문, 청마루다. 남자는 마당에서, 아녀자들은 마루 위에 자리 잡아 유별하고 있지만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흥이 있고, 상부상조하는 두레정신이 공존하고 있다. 더러는 양복에 넥타이 차림도 있지만 어른들은 모시한복에 중절모요, 아이들은 까까머리 일색이다.

 

  아, 하늘은 맑고 들판은 풍년이었던 그날의 풍경이여! 돌담장 울타리안 빨래줄이 마당을 가로질러 나르던 고추잠자리여! 모두가 사돈에 팔촌처럼 가깝기만 하던 마을 어른들이며 코흘리개 철부지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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