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홍시와 대추

죽장 2006. 8. 31. 08:19

  지난 해 가을 고향의 성묘길이었다. 시골 집 고목이 된 감나무는 더욱 무성해져 있었고, 짙은 그늘 아래 떨어져 있는 홍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이미 상해 곰팡이가 핀 것도 있었지만 금방 떨어진 듯 싱싱한 것도 많았다. 주워가기는커녕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듯 하다. 그 맛있는 홍시가 언제부터 이렇게 푸대접을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바알갛게 익은 감은 언제나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익은 감은 홍시를 만들어 할아버지에게 드리기 위하여 광으로 직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풋감은 사정이 달랐다. 떨어진 풋감을 주우려면 남보다 먼저 일어나야 했다. 어둠을 비집고 더듬거리며 감을 주워서는 몰래 감추어두고 떫은맛이 삭아지기를 학수고대했었다. 이른 새벽 미쳐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각인데도 눈 비비며 일어나 감나무 아래를 헤매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아침 산책길에 보니, 얕은 언덕 위에 대추가 익어가고 있었다. 이 대추 역시 사람들의 입맛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시선조차 끌지 못하고 있다. 언덕위에 달린 대추를 보는 순간 고귀한 사람에게 언덕 위의 꽃을 꺾어준 「헌화가(獻花歌)」가 생각난다.

  때는 신라 성덕왕 때이고, 무대 상황은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의 동해안 어느 바닷가였으리라.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은 천 길 벼랑 위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고 크게 감탄한 나머지,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종자(從子)들 중에는 누구도 선 듯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소를 이끌고 가던 어떤 노인이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노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대추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언덕 위에서 탐스럽게 익어가는 대추를 따서 아버지에게 드린다면 꽃을 받아 든 수로부인보다 더 좋아하셨으리라. 아버지는 대추도 없고, 감홍시도 없는 저승에서 이 자식을 그리워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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