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추억 여행

죽장 2006. 10. 19. 08:15

 

  마흔 한 살의 도연명(陶淵明)이 직장을 팽개치고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귀거래사’를 읊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이다. 굳이 도연명의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철이 든 이후 직장 따라 객지를 떠돌면서 나도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은 늘 향수의 대상이었다. 고향집에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고, 그 곳에 가면 지금도 함께 학교 다니던 친구들이 예전 그 모습으로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일 뿐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젊어서는 자식공부 때문에 시골로 돌아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아이들이 장성하여 떠난 뒤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핑계가 나의 귀향을 강력하게 막았다.

  그러나 때때로 일상의 삶에 회의와 권태가 심각하게 밀려들면 잠재되었던 나의 귀거래사가 불현듯 되살아나고는 했다. 막상 큰 용기를 내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는 또 반겨줄 부모도 없고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낼 전원도 없다는 또 다른 현실이 발목을 잡았었다.

  도연명의 그때 나이보다 열 살은 더되어 나도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향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고향 가까이에서 살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날마다 고향 마을을 지나 출퇴근하는 소원을 성취한 후 살펴보니, 집들은 초가지붕에서 시멘트지붕으로 바뀌었고, 골목길이 약간씩 넓어졌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뒷산도 그때처럼 푸르고 앞 들판의 논들도 여전했다. 그래,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고향에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차를 타고 마을 앞길을 지날 때마다 창밖으로 애틋한 눈길을 던진다. 행인이 있으면 혹시라도 아는 사람은 아닌지 유심히 보게 된다. 고향마을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시절, 그 사람이 생각난다. 동네의 집이며,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그때의 정경들과 쉽게 겹쳐서 존재하였다.


  여기 큰 살구나무 아래서 늘 군침을 삼켰었고, 저기 감나무에는 홍시가 탐스럽게 익어 갔었지. 동네 아이들의 집합소와 저녁마다 쏘다니던 골목은 그 모습 그대로다. 이 골목의 돌담길 입구에서 뱀을 만나 놀라 뛰어 들어간 앞집 마당 한편에 팔뚝보다 굵은 옥수수가 수염을 흔들고 있었지. 매캐한 모깃불 냄새와 함께 어둠이 내리면 지붕 위의 박이 달인 양 빛났어. 백설이 푸짐하게 쏟아진 날 처마에 달린 고드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고왔고, 구멍 난 양말을 신은 우리들은 그 겨울도 춥지 않았네.

  골목 안 양철대문 집 '늠이'는 이뻤어. 내 맘에 쏘옥 들었으니까. 이쁘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는 사이에 시집을 가버렸지. 달 밝은 밤이면 밝아서, 별들만이 졸고 있는 칠흑 같은 밤이면 어둠이 더 좋다는 이유로 골목을 서성거리고 있다가 대문을 걷어차고는 걸음아 살려라하며 골목을 빠져나왔던 일을 지금은 밝혀도 괜찮겠지.


  오늘 아주 오랫만에 고향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추억여행을 하였다. 이 집 저 집, 이 골목 저 골목서 발길을 멈추고 회상에 젖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고는 하였다. 사람은 달라도 머물고 있는 바람의 냄새는 그 시절과 같았다.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매미소리도 꼭 같았다.

  마을 뒤편 양철대문 집 앞에서 한참동안 묵상에 잠겼다가 돌아섰다. 과거의 회상에서 벗어나니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나와 동갑내기들은 바야흐로 회갑을 앞둔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한 그들은 겉표정 뿐 아니라 정서도 달랐다. 골목을 오가는 아저씨 아줌마들은 대부분 낯선 사람들이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노인에게는 ‘아무개집의 누구’라고 접두사가 붙은 인사를 큰소리로 해야 겨우 기억을 되살리며 알아본다. 내가 태어난 집에 살고 있는 조카 녀석과는 몇 마디 인사만 하고나면 금방 할 말이 없어진다. 이것이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의 실상이었다. 고향 마을은 이제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의미 없는 보통의 마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얼굴을 아는 사람과도 의례적인 인사가 오갈 뿐 진정으로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고향 가까이 살면서 그 가시내가 시집가 살고 있는 동네를 날마다 지나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한번쯤 그 집으로 찾아가 근황을 살피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린 시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오늘도 그 집 앞을 지났다.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한번 마주쳤으면 하는 바램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막상 그 마을 앞에서 마주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요즘도 가끔

       네 이쁜 모습이 생각난다고

       고백을 할까.

       그것이

       내 첫사랑인 줄을

       그때는 미쳐 몰랐다는

       고백을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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