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제주정신

죽장 2007. 1. 4. 10:58

  택시기사에게 삼성혈로 가지고 하였다. 자신을 ‘전주이씨’라 밝히는 친절한 기사는 삼성혈에서 태어난 고(高)·부(夫)·양(梁)씨 외는 자신을 포함한 도민 전체가 육지에서 귀향 온 사람들이 퍼뜨린 후손들이라며 제주의 원주민 3성에 대하여 열변을 토한다. 전주이씨 가문에서 시집온 마누라도 옆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년 전. 사람이 살지 않은 탐라의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毛興)’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이 동시에 태어났는데, 그 곳이 바로 오늘의 ‘삼성혈(三姓穴)’이다. 을라(乙那)라는 이름의 이들은 각각 고을라, 양을라, 부을나로 고씨, 부씨, 양씨의 시조이다. 어느 날 삼신인이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목함이 파도를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목함 속에는 자색이 출중한 공주 세 사람이 있었고, 삼신인은 이들과 혼인을 하였다. 온평리 앞 바닷가를 연혼포(延婚浦)라 하며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지금도 해안가에 남아 있다. 삼신인이 목욕한 혼인지(婚姻池)며, 신방을 꾸몄던 신방굴(神房窟)의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문화재 해설가로도 손색이 없는 기사의 열변에 심취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택시는 삼성혈에 도착하고 있었다. 탐라국의 시조인 삼을나(三乙那)왕이 용출되었다는 성혈에는 신비롭게 눈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경사면에서 자라고 있는 수 백 년 된 수목들이 모두 중심부인 혈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경건한 마음으로 목례를 올리고 있는 듯하다.

 

  3성이 이룩한 탐라국에서 발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제주정신을 생각해 본다.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권력쟁취를 위한 투쟁도 없었고, 배필을 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다툼도 없었으며, 3신인이 활을 쏘아 분할지역을 정한 후에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영토전쟁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원주민 삼성의 후손들과 육지에서 귀향 온 선비의 후손들이 화합하여 살아오면서 가꾼 제주의 평화 존중 정신, 자립과 화합 정신이 되었으리라. 돌이 많은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감귤농사를 지어 부를 창조한 개척정신이고, 몽고의 침입에 굴하지 않았던 자립정신이리라. 특히 특별자치도로 바뀐 이래 세계인들이 즐겨찾는 관광지로 변모시켜가는 근본이 삼성혈에서 출발한 제주의 정신이다. 나는 이것을 삼성정신(三姓精神)이라 부르고 싶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대조영』을 즐겨보고 있다. 제주도 원주민이자 왕족의 후예인 부씨 양씨 고씨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고 있는 ‘부귀원’과 ‘양만춘’이고, 유명 탈렌트 ‘고두심’ 역시도 바로 고씨의 후예라며 웃었다. 조선시대의 왕족의 후예가 틀림없는 택시기사 전주이씨 당신의 할아버지는 탐라섬으로 귀향 온 어느 왕손의 자손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전주이씨 회안대군파인 아내가 멋쩍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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