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미나리

죽장 2006. 3. 21. 15:39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이 왔다. 먼 산의 아지랑이와 함께 찾아오는 나른함이 밀려든다, 귀기울이면 버들강아지를 적시며 흘러가는 개울물소리가 들린다. 눈을 들면 온 산을 물들이는 진달래꽃 붉은 물결이 안겨온다. 식탁 위에 올라온 달래, 냉이의 맛과 쑥의 향기가 봄의 냄새인 양 후각을 자극한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봄소식이 한이 없지만 나에게 있어 봄은 미나리와 함께 다가온다. 봄의 색깔은 파란 미나리색이고, 미나리 무침에서 나는 내음이며, 미나리부침개를 주제로 한 젊은 아줌마들의 야외나들이 풍경이다.

 

  미나리는 옛날의 노랫말에도 나온다. 조선 19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모함으로 쫓겨나 6년동안 안국동 본가에서 칩거하면서도 남을 원망하기는커녕 자신의 폐위를 하늘의 뜻으로 받들어 근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쫓았을 때에 백성들이 이를 안타까워하며 지어 부른 노래가 ‘장다리는 한철이나 미나리는 사철이다 /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다 / 메꽃 같은 우리 딸이 시집 삼년 살더니 / 미나리 꽃이 다 피었네’ 라는 “미나리와 장다리”이다. 장다리는 키가 크지만 한 철로 곧 시들고, 미나리는 얼음장 밑에서도 푸르게 돋아나는 것처럼 장희빈의 위세는 곧 시들어질 것이고 진실된 마음을 가진 인현왕후는 미나리 같이 푸른 생명력으로 활짝 피어나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장희빈을 알 턱이 없는 어머니지만 해마다 이른 봄의 식탁을 봄나물로 장식하고는 하셨다. 바람이 차가운 입춘 무렵인데도 무명치마를 펄럭이며 밭이나 논두렁에 돋은 달래와 냉이를 뽑아와 삶고 무치고 하였다. 참기름 냄새가 곁들여 있는 나물무침은 달큰한 봄맛 그 자체였다. 콩가루와 버무린 냉이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춘궁음식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냉이에 꽃이 피고 뿌리가 억세어지면 집 앞의 미나리꽝에는 미나리가 파랗게 자란다. 미나리는 무침으로, 부침개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냉이가 채워주었던 배고픔을 이어주었다. 동네의 여인네들이 진달래 핀 인근의 산에 올라 미나리부침개를 만들어 먹으며 한나절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먼 산에는 아지랑이가 너울거리고, 가까운 보리밭에서는 종달새가 노래를 불렀다. 소년은 미나리 같은 푸른 꿈을 키워나갔다.

 

  미나리는 물기 많은 땅이면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란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우물 아래는 물론이고 하수도와 잇닿은 지저분한 곳도 가리지 않는다. 베어내면 다시 돋는다. 미나리는 짙은 향으로 미각을 돋워 줄 뿐 아니라 각종 약재로도 사용되고 있다. 냉이는 겨울햇살이고 미나리는 봄내음이다.

  

  청도로 봄맞이를 가지고 아내를 설득했다. 내심은 추억의 갈피에 잠재되어 있는 미나리를 재생시키고 싶어서였다. 소싸움 광고가 현란한 시가지를 지나 한재로 진입하니 골짜기 전체를 하얀 비닐하우스가 메우고 있었다. 미나리꽝이 지천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맑은 물을 퍼 올려 미나리를 씻고 있는 아낙들의 손길이 바쁘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미나리를 먹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돼지고기와 미나리가 궁합이 맞는 줄을 여기와서 알게 되었다.

 

  청도의 한재미나리는 줄기에 붉은색이 비치고 통째로 입에 넣었을 때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와 함께 맛과 향기가 진하다. 백화점에서 한 묶음에 2천원씩 하지만 다른 상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값이 비싼 이유가 있다. 봄바람을 맞으며 미나리 한 단을 사들고 왔다. 먼저 생미나리를 된장에 찍어 먹었다. 참기름 무침을 해서 먹었다. 남은 것은 부침개를 만들어 먹었다. 시골 미나리꽝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의 미나리와 오늘 먹는 한재미나리를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 땅 어디에서나 돋아나 맛으로, 색으로 봄을 상징하고 있는 미나리이다. 정의의 편은 언제나 고난이 따르나 결국은 다투어 꽃이 피게 됨을 믿어왔던 장희빈 시대 선조들의 신념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오고 있는가 하면, 들에 나가서 봄미나리를 뜯어 오셨던 나의 어머니가 계셨기에 나의 봄은 언제나 미나리와 함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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