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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장의 지폐(이재호)

죽장 2005. 10. 13. 12:32
석 장의 지폐

1964년, 그 해 겨울은 무척 빨랐다. 11월 말인데도 벌써 교정 구석진 곳에는 흰 눈이 쌓여 있었다. 청량리 S대학교 예과 건물은 겨울이 아니더라도 황량한 곳이다. 붉은 벽돌로 멋없게 지은 건물. 일제 시대 건물을 물려 받은 후 한 번도 수리한 적이 없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인민군이 주둔하기도 했고, 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전쟁이 끝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 여기저기 탄흔을 볼 수 있었다.
겨울 해라 그런지 삼층의 무기 화학 실험실에는 벌써 저녁 기운이 스며든다.
깨진 창문 틈으로 다닥다닥 붙은 청량리역 주변이 보인다.
  전쟁이 끝난 지 십일 년.
'기사 선상에서 헤매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혁명 공약을 내걸고 육군 소장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지도 이 년이 넘었는데도 기아는 아직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여기 비커 좀 잡고 있어."
옆 번호의 서울내기가 내 골똘한 생각을 깨지 않았다면 실험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때 나는 오늘 저녁 어디를 찾아가야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친척이 한두 집 있었지만 신세 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다시 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별다름없는 빈털터리였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하는 성격 탓에 친척에게 버스표 한 장 값을 달라지 못해 통금을 무릅쓰고 종암동에서 이문동까지 걸은 적도 있었지만 자존심 같은 것이 나를 늘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경험 탓인지 성인이 된 후에도 남의 집에서 잠자지 않는 습관이 붙었다.
"너 어디 아프냐?"
옆 친구가 묻는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어제 저녁부터 쌀도 연탄도 떨어진 터라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법도 하다.
그 때 서무실 여사환이 실험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앞 로카학생에게 무어라 말한다. 총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시골서 누가 찾아왔단다."
하고 외친다.
"시골서……?"
"너, 향토 장학금 왔나보다."
'아버지가 오실 리 없는데' 하며 서무실로 따라 나섰다. 찬바람이 부는 옥외 계단에 나서니 남으로 떠나는 열차의 하얀 증기에 노을이 서리고 있었다. 문득 느끼는 향수.
선배들이 버린 가운을 그냥 주워 입어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고, 45Kg의 깡마른 체구, 외사촌형에게서 얻은 딴 대학 교복을 짜깁기로 우리 대학 교복식으로 만들어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도 일 년이 가깝다.
서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키가 크고 깡마른 선생님, 고등학교 때 국사를 가르치던 황선생님이 난로 가에 앉아 계셨다.
스님 같은 체취가 풍기던 선생님.
"선생님, 웬일이십니까?"
"네가 공부 잘하나 싶어 왔지. 그래 견딜 만하냐?"
생각지도 않던 은사님의 방문에 적잖게 당황하면서도 서울 생활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치밀어 눈물을 보일 뻔했다. 가난이 미만해 있던 전후, 시골서 서울로 대학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교 소식을 전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고 서무실 직원에게 시골식으로 여러 번 부탁을 되풀이하신 후 자리에서 일어서셨다.
"너,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 자취한다니 식사 거르지 말거라."
교문을 걸어 나가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당부하실 때 나는 속으로, '거르고 말고 할 식사가 없습니다.' 하며 선생님을 따라 교문으로 나서고 있었다.
계절보다 찬바람이 분다. 전쟁을 치른 나라의 수도답게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언덕빼기에는 증기 기관차의 기적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교문 가까이에서 선생님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셨다.
"힘들더라도 견디어야 한다."
나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너하고 식사를 함께 하려고 했는데 차 시간 때문에 안 되겠다."
하시며 안주머니를 뒤지시더니 지폐 석 장을 꺼내신다.
"받아라."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 때 바람이 불어 지폐 한 장이 수위실 쪽으로 날아갔다.
선생님은 그 큰 키로 껑충껑충 달려가 지폐를 주워 내 손에 쥐어 주시고
"간다."
하시며 건널목을 건너셨다.
그때 내 손에 쥐어진 석 장의 지폐가 얼마짜리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25년 후 선생님이 58세의 아까운 나이로 돌아가셨을 때 대학 동기들에게 물가 환산을 해 가며 그 지폐가 얼마짜리인지 물어 보았지만 대답하는 사람마다 엉뚱한 소리를 해대서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5원짜리인지 10원짜리인지. 혹은 100원짜리인지……. 더러는 그때 쌀 한 되가 얼마이고 우동 한 그릇 값이 어떻고 하면서 얼마짜리라고 주장했지만 세월의 지층이 너무 깊었고 뇌세포의 풍화가 너무 심해 자신이 없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석 장의 지폐를 쥐고 실험실로 돌아왔을 때 수업은 끝나고 있었다.
지금은 빌딩 숲으로 번화한 도심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이문동 고개만 넘으면 황량한 벌판이었다. 값싼 자취방을 구하다 보니 이문동 고개 넘어 버스를 내려 논길을 한참 걸어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피난촌 한구석에 자취방을 구해 놓고 있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연탄 열 장을 주문하고 쌀 한 되인가 두 되인가를 봉지에 담고 마가린 한 통을 사고도 한 장이 남았다. 그때 자취생들은 주로 마가린에 밥을 비벼 먹었다. 반찬이 하나도 필요 없는 식사법이었다.
며칠을 비워 둔 연탄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연기 때문이기도 하고 감동 때문이기도 해서 눈물이 뒤범벅되어 밥을 지었다. 빈속에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노곤해진 눈으로 다시 지폐를 꺼내 보았다. 지폐 위에서 배어 나오는 피 같은 따사로움.
졸업 후, 대학병원 인턴으로 첫 봉급을 받았을 때 나는 석 장의 지폐를 떼어 안 주머니에 넣었다. 만이천 원 중 삼천 원이었으리라. 정종 한 병, 고기 몇 근을 사 들고 선생님 댁의 대문을 들어서면서 '석 장의 지폐' 하고 조용히 중얼거려 보았다. 그 날 저녁 선생님은 스님 같은 표정을 깨고 즐거워하셨다.
개업 후 나는 선생님의 수제자를 자처하며 고향을 드나들었고, 남이 부러워하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장학회를 만들 때도 선생님의 간단한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것저것 선생님의 뜻이라면 어기지 않았다.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일부러 큰절을 올린 것도 사실은 그 석 장의 지폐 중 한 장 정도는 갚고 싶어서였다.
나는 두 장 정도는 갚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엑스레이(X-ray) 한 장을 주시며
"간이 좀 나쁘다 하더라."
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엑스레이 필름을 떨어뜨릴 뻔했다.
여기저기 구멍난 간 조직, 종합 병원으로 모시고 그 복잡한 검사 결과는 진행된 간암.
손을 쓸 수 없다는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겨울 볕이 드는 선생님 방에서 나는 석 장의 지폐에 대한 감사를 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선생님, 아직 한 장이 남아 있습니다. 지폐 한 장의 빚이……."
선생님은 가셨다. 찬바람에 날리던 지폐 한 장을 줍기 위해 껑충껑충 뛰시던 그 큰 키도, 내 손에 지폐 석 장을 쥐어 주시던 그 따뜻한 손길도…….
누가 인생을 잡지 표지처럼 통속한 것이라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