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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스웨터(이재호)

죽장 2005. 10. 13. 12:21
빨간 스웨터

중요한 약속까지 깨면서 국민학교 동기회에 참석하기로 작정한 것은 캐나다에 이민 가 살고 있는 동기생의 향수병 때문이었다.
이민 간 지 20년 가까운 이 친구로부터 국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봄부터였다.
국민학교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자기 집에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를 우리 집 마당에 매어 놓고 떠난 지 십 몇 년 동안은 연하장 한 장이 고작이었다.
“이 개 잘 키워.”
약간 젖은 듯한 목소리로 악수를 나누고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눈시울을 적시던 친구로서는 무심한 일이었다.
요 몇 년 사이에 연하장 사연이 길어지더니 드디어 국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나이 드니 고향이 그리워지는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틀에 한 번씩 국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할 때는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꽃이 피었느냐, 진달래를 보았느냐, 보리는 얼마나 자랐느냐.”
아무리 통신이 발달되었다 해도 거기가 어딘데……. ‘아하, 이 친구 향수병에 걸렸구나.’ 향수병도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우리는 세월의 지층에 묻혀 흔적도 희미한 옛일들을 비싼 국제 전화통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던 여학생 이야기, 여학생 고무줄만 전문으로 끊고 다니던 심술쟁이의 근황, 그 친구는 희미한 옛일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말하고 있었다. 향수병에 걸리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고향길에 접어들어 구름에 가린 옛 산, 옛 언덕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옛 일, 옛 얼굴들이 낡은 영사기의 화면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고향에 올 때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향수병이 심하면 옛 일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슬픔 같은 그리움을 느꼈다.
어떤 얼굴로 어디를 헤매다 돌아와 있을 것인가?
43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우리가 국민학교 입학한 때는 1950년 봄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있던 상주국민학교에서 분교되어 상영국민학교가 개교한 것이 1949년이었으니까 우리가 2회가 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년. 어수선하고 가난했던 시대이었지만, 폐허가 된 제사 공장을 학교랍시고 학생들을 받기 시작한 것은 너무한 일이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검고 음울한 건물, 공장 폐품이 여기저기 뒹굴고 석탄 찌꺼기가 널려 있는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가졌다. 초라하고 우울한 입학식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43년이 지난 지금에도 늘 신선한 느낌을 들게 하는 입학식이었다. 검고 음울한 건물을 배경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담임선생님은 빨간 스웨터를 입은 여선생이었다. 스물 몇 살쯤 되었으리라.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예쁜 얼굴에다가 하얀 블라우스, 빨간 스웨터. 바래지 않은 사진처럼 지금도 선명하다.
경이의 눈으로 쳐다보는 우리들을 선생님은 찬찬히 뜯어보았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아이들답게 얼굴은 마른버짐 투성이였고, 다 해진 무명바지, 학생복 같은 것을 입고 있어도 여기저기 기운 것이 보통이었다.
까만 고무신, 좀 더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해진 고무신을 새끼줄로 칭칭 묶고 있었다. 기계충으로 지도 모양 머리카락이 빠진 때 묻은 제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하던 따스한 눈길 때문에 우리는 행복했었다.
교실이 없어 운동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수업하면서도 우리는 낄낄거리고 장난치고, 목소리를 높여 “영이야” “철이야”를 외치고 있었다. 운동장 저편에서는 개나리가 피고, 보리이랑에는 뻐꾸기 소리가 일렁거렸다.
6월에 전쟁이 났다. 담임선생님은 쳐들어온 공산당을 모조리 쳐부수고 북진 통일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고함치며 좋아하고 무언지 모르면서 ‘북진 통일’을 외치고 무언지 모를 군가도 불렀다. 7월 초순까지 우리는 그렇게 보냈다. 칠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 인민군이 상주군 근처까지 왔다는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고 안심하라 북진 통일한다고 확성기를 달고 떠들던 지프차도 보이지 않더니 담임선생님은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피난길 주의 사항을 말하고 울음으로 끊기다 이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다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무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헤어졌다. 일고여덟의 작은 육체를 가지고 전쟁의 포화 속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전쟁 기록 영화를 보노라면 포화 속에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울고 있는 어린이가 바로 우리들이었다.
다시 학교 문을 연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폭탄으로 여기저기 부서진 철길을 따라 학교로 갔다. 일 년 전 그때처럼 보리이랑은 바람에 하늘거리고 무심한 뻐꾸기는 철모르고 울고 있었다.
“누구누구가 돌아와 있을 것인가!”
아직 피난에서 돌아오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친구도 있고 더러는 다쳐서 못 오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지만, 스물 댓 명, 한 학기 동안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어도 오십 명이 약간 넘었다. 백이십 명이던 두 반이 한 반으로 편성되었고 육학년까지 학생 수가 가장 적은 학년이 되었다. 동기 여학생이 용케도 간직했다가 가지고 온 한 장짜리 졸업 사진에서 세어 보니 58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 살이 더 먹어도 더 작아진 체구. 그 어린 나이답지 않게 죽음을 보아야 했고 굶주림에 떨던 우리들의 눈동자 속에서 금간 구슬처럼 상처투성이들이었다. 그 나이답지 않게 영악해져 있었고 더러는 말을 잊고 있었다.
곧 돌아와야 한다던 담임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이북으로 붙잡혀 갔다고 하기도 했다.
다시는 그 순결한 색깔의 빨간 스웨터를 볼 수가 없었다.
빗속 저 너머 모교의 건물이 보였다. 그 후 우리 어린 손으로 모래를 나르고 터를 닦아 지은 건물은 보이지 않고 현대식 4층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모임 장소로 정해진 식당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떤 얼굴로 다시 돌아와 있을까?
그날 모인 동기생들은 열 명이었다. 두서너 명 빼고는 낯설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옛 얼굴이 떠오르기는 해도 낯설은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돌아가며 이름을 부르고 복사해 온 작은 졸업사진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왜 이렇게 적게 모였지?”
“보통 사람들은 다 죽고 독한 놈들만 살아남다 보니 그렇지.”
죽은 동기생들이 열 명을 넘었다. 그 작은 몸뚱어리로 그 모진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그들이었지만 급격히 변하는 시대 속에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멀리 가 있고 더러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내년에는 열다섯 명을 모을 것이라 했다.
천둥소리가 나고 빗물이 창문에 흐른다. 우리들의 세월처럼 우릉우릉 천둥이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