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언치놓아 지즐타고(구활)

죽장 2005. 10. 13. 12:28
언치놓아 지즐타고

“재너머 성권농(成勸農) 집의 술닉닷 말 어제 듣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노하 지즐타고
아해야 네 권농 겨시냐 정좌수(鄭座首) 왓다 하여라“

우리 옛 시조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시 한수를 골라라 하면 나는 단연 송강 정철의 이 시조를 꼽는다. 요즘 말로 코드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내 취향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은 재 넘어 살고 있는 저보다 한 살 위인 성권농(본명:성혼 호:우계)이 아해놈을 시켜 전해 온 “우리 집에 술이 다 익었다네. 내일 해걸음에 술이나 한 잔 하세”라는 기별을 귀가 아닌 혀끝으로 듣는다. 송강은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 밤과 하루 낮을 조바심하며 보낸 후 ‘타는 저녁놀 속에 술 익는 마을’의 친구를 찾아 나선다.
송강의 기분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아편장이 아편 맞으러 갈 때와, 오입장이 여자 만나러 갈 때의 그 기대에 부푼 호기로운 심사와 꼭 같았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소 등에 까는 담요 같은 물건)놓아 지즐 탈 때(눌러 탈 때)’ 송강의 기분은 아마 최고조에 달했으리라.
이럴 때 고어(古語)로 추임새를 넣는다면 “덩뎌듕셩 덩뎌듕셩 위 덩뎌듕셩”이 제격이다. 느린 소 보다 급한 마음이 한발 앞서 달리는 재 넘어 길을 가면서 송강은 이렇게 읊었으리라. “쉰 술 걸러 내여 맵도록 먹어 보세. 쓴 나물 데워 내여 다도록 씹어보세”

한편 송강을 초대한 권농은 오후 들면서 사립께를 쳐다 본 것이 벌써 몇 번째다. 밀쳐둔 대사립문이 마음에 걸려 송강을 등에 태워온 소가 머뭇거리지 않도록 활짝 열어둔다. 그러나 기다리는 벗님네는 좀처럼 오지 않고 낮달만 아비도 못 알아보는 낮술에 취해 희멀건 얼굴이 감나무에 걸려 있다.
술시(酒時)를 맞춘다는 게 늦었나 보네. 그래서 송강은 자신을 기다리는 성권농의 속내를 미리 헤아려 이런 시조를 지었나 보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현상과 경우를 바꿔 생각해 본다는 것은 분명 남을 위한 배려이자 보시다. “곳즌 밤비의 피고 비즌 술 다익거다 거문고 가진 벗이 달함끠 오마터니 아희야 초첨에 달 올라다 벗님오나 보아라” 송강은 역시 시의 달인이다.

정말 멋진 밤이다. 오랜만에 만난 풍류객들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는 이는 권농의 처와 송강의 귀가 길 바닷가에서 만난 갈매기나 겨우 알았을까.
“명사길 니근말이 취선을 빗기시러 바다할 겻태두고 해당화로 드러가니 백구야 나디마라 네 벗인 줄 엇디아난”
송강은 소를 타고 왔는지 말을 타고 왔는지 그것조차 잊어버리고 잔등에 비스듬히 실려 가면서 해당화길 옆에 있는 백구를 보고 친구하자고 보챈다. 그러나 갈매기는 “우리 친구들이 술 취한 사람하고는 놀지 말랬어요”하고 날아가 버린다. 백구도 훨훨, 마음도 훨훨.

저녁달이 술잔에 거꾸러지고 술항아리에 별이 떨어질 무렵 송강은 소를 빗겨 타고 왔던 길로 되돌아 가버린다. 잠시 필름이 끊긴 권농은 타는 목마름이 깨운 깔딱 잠에서 깨어나 물을 찾았으나 아직 헐지 않은 항아리에 가득한 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신새벽에 이슬 머금은 푸른 산과 마주 앉아 해장술을 한잔 하며 가버린 친구를 그리워한다.
그리고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로 시 한 수를 적는다.
“전원에 봄이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꽃 남근 위 옴김여 약 밧츤 언제 갈리
아희야, 대뷔여 오너라 삿갓몬져 결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