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울고 있는 모래밭(구활)

죽장 2005. 10. 13. 12:18
울고 있는 모래밭

김신용의 시를 읽는다. 슬픈 영화는 눈물로 보아야 제 맛이라 하지만 그의 시는 눈물이 말라버린 맨눈으로 읽어야 한다. “어떤 사랑도 고귀하지 않은 것은 없고 하찮은 사랑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는 통념을 깨는 것이 바로 김신용의 시다.
태초 이래 인류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사랑의 개념 위에는 반드시 ‘아름다운’이란 형용사가 붙어 다녔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만남, 아름다운 이별 등. 사랑은 그만큼 아름답고 고귀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신용은 이른바 가진 자와 유식한 자들이 호사스럽게 즐기고 있는 사랑에 관한  가식된 휘장은 무참하게 벗겨버린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사랑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며 관념이 아닌 실체로, 오로지 정신이 아닌 육체만이 사랑 속에 잠입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는 플라토닉이니 심지어 에로스란 말도 거부하고 밑바닥 인생의 쭈그러진 성기까지,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루가 고단한 인생들이다. 도시의 부랑자, 전과자, 창녀, 지게꾼, 노동자, 마약중독자등 이른바 양아치들이다. 부자들이 보면 그들은 거지이고 식자층의 눈에는 무식한 놈들이지만 시인이 보는 눈에는 아직도 사랑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군상들이다. 그의 시에는 빈곤 하류층만이 주어로 등장할 뿐 대통령 국회의원 학자 부자는 눈을 닦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이 더 오염되어 있는 집단이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을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굳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 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공중변소 속에서’의 부분)

김신용은 열여섯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양동 창녀촌에서 살았다. 말이 살았다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창녀촌 일수방에서 쫓겨나 잠잘 곳이 없을 땐 일부러 도둑질을 하여 감옥에서 따뜻한 겨울을 나기도 했다. 피를 팔다 그것도 모자라 받았던 정관수술을 다시 받아 정부 보조금으로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라면을 사기 위해 지게꾼이 되었고 지게를 도둑맞았을 땐 굶었다. 굶어도 시간은 지나갔다.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시간을 죽이는 약은 작살주(막걸리에 소주를 탄 것)뿐이었다. 몇 잔 마시고 나면 내장 곳곳이 가로등 켠 것처럼 환해지고 마침내 똥구멍 끝이 노글노글해지면 ‘씨부랑탕’ 욕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고 그런 다음에 시가 나온다고 했다.

‘오늘 지게를 잃어버렸습니다./ 피를 팔아 마련한 그 지게를/ 상점 앞에 세워두고 짐을 가지러 간 사이/ 내 꿈은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흘 동안 거리 곳곳을 배회했습니다./ 배고픔의 사막을 건너게 해줄 낙타를 찾기 위해/ 다시 피를 팔았습니다./ 오늘도 공쳤습니다./ 낯선 지게꾼 하나가 다가 왔습니다. 순간/ 이 지게 도둑놈! 그러나 지게처럼 그는 늙어 있었습니다./ 지게를 빼앗긴 그는/ 관절 마디마디 무너져 내리는 모습으로/ 자꾸만 뒤돌아보며.../ 그러나 어느새 나는 무너져 내리는 몸짓에 지게를 입혀주고 있었습니다. (’더 작은 고백록‘중의 부분)

김신용은 1997년 통칭 ‘IMF’라고 불리는 외환위기가 터지자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살고 있던 반 지하 전세금을 빼내 친구의 채소장수 트럭에 가난과 울분을 몽땅 쓸어 담아 싣고 남으로 남으로 남하하여 이른 곳이 전남 완도군 신지면 임촌리 바닷가였다.
양동 창녀촌에 살 때도, 감방에 몸을 뉘였을 때도, 고만고만한 달동네 판자촌 방 한 칸을 빌려 살 때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시를 썼는데 신지도란 섬에 들어오고 나니 생애 중에서 그날처럼 앞이 캄캄한 날은 정말 없었다고 했다.
낯선 풍경은 시인의 눈에 비치면 모두 시가 된다는데 신지도의 경우는 달랐다. 저녁노을이 서쪽 바다에 쇳물을 부은 듯 금빛 휘장을 둘러도, 바닷새들이 수평선 아래위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어도, 해변의 여름 추억이 조개껍데기로 군데군데 박혀 있어도 그것은 시가 되지 못했다. 도시의 삶을 지탱해 주던 천형 같았던 지게가 자신의 등뼈에 접골되어 있는 듯한 환상통에서 벗어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시인 자신이 바로 신지도 명사(鳴沙)십리에 깔려 있는 ‘울고 있는 모래’였던 것이다.

‘물결에 쓸리고 있는 발밑의 빈 조개껍질들이,/ 그 빈 시간들의 두개골 같아/ 그 무수한 세월의 발자국들이 찍힌/ 내 몸의 모래밭이 꼭 납골당 같아/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임촌리./ 고요한 날이면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린다는 우는 모래,/ 그 명사(鳴沙)의 모래밭을 다시 걷는다. (’명사에서‘중의 부분)

지금껏 풍류를 노래하고 있는 나도 결국은 ‘울고 있는 모래밭’의 한 알 모래에 불과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