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잊을 수 없는 흑백사진

죽장 2006. 3. 23. 09:02
  아침 신문에 난 ‘증손자 둔 할머니 12번째 아이 낳아’란 기사를 읽는다. 올해 62세인 재니스 울프란 할머니가 손자 20명, 증손자 3명을 두고 14세 연하인 세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손자들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삼촌’이라 불러야 하고 증손자들은 ‘작은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아기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하도 기가 막혀서 ’응애‘하고 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으리라.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 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보이네.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백년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신라 와당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덕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정일근의 ‘흑백사진-가물치’중에서)
  고모부가 외손자를 두고 출산을 한 장모님을 축하해주러 가물치를 사들고 사립에 금줄을 쳐둔 처가에 갔으니 얼마나 쑥스러웠을까. “김서방 오는가” 소리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장모는 민망한 얼굴로 웃고 있고, 아기의 아버지인 장인어른은 신라와당의 푸른 웃음으로 부끄러움을 감추고, 사위인 고모부는 불장난하다 들킨 아이들 앞에 선 선생님처럼 나무랄 수도 타이를 수도 없는 난감한 얼굴로 웃고 있다. 흑백사진에서 보는 진풍경이다.
  시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장인어른은 젊은 한 시절 바람께나 피운 모양이다. 그래서 장모님 속을 어지간히 태웠겠지. 딴 집 살림을 겨우 걷어치우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붙잡아 두기 위해 장모님은 철 지난 꽃이 서리 내리는 계절에 꽃망울 맺듯 그렇게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았으리라. 손자들이 “삼 추운...”하고 불러야 할 그런 아기를.
  정일근 시인의 연작시인 ‘흑백사진-그 여자’란 시를 읽어 보자. 장인어른의 젊은 날이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듯 하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말이 없다. 저녁햇살에 길어진 감나무 그림자가 그 곁에 눕고 댓돌 위에는 가을하늘처럼 맑은 옥색 고무신 한 켤레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어머니 낮은 목소리 사이 가끔씩 낯선 울음소리가 흘러나와 안방 문풍지를 적시고 툭툭 할머니의 타이르는 소리 무겁게 새어나왔다. 아버지는 돌아앉아 말이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도 견고한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적 화자인 아버지가 네 살 때 돌아가신 내 아버지처럼 바람을 피워 옥색 고무신을 신은 ‘그 여자’를 집으로 데려 온 모양이다. 할머니는 아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안쓰럽긴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고 타일렀고 결국 아버지도 단념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옥색 고무신도 울고, 아버지의 어깨도 울고, 낮은 목소리의 어머니도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고, 할머니 마음 또한 눈물의 강물로 출렁거린다. 흑백사진의 진풍경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성님 동상”하며 지낸 고향의 서사리 아지매 생각이 난다. 아주 작은 평수의 능금밭 농사를 하던 아지매는 쉰이 가까운 나이에 늦둥이를 뱄다. 장날 장에 나왔다가 남산만한 배를 안고 집으로 들어온 아지매는 “동상아. 안 있나 그쟈. 그날은 아침부터 능금나무 전지를 하고 하도 고단해서 농막에 누워 있는데 빌어묵을 영감쟁이가 들어오더니 슬쩍 다리를 잡아 땡기는기라. 달거리도 있다 없다 하길래 안 괜찮겠나 싶었는데 고마 이래 됐능기라. 동네 부끄러버 죽겠다 앙이가.”
  아지매의 맏딸은 이미 시집은 갔지만 아기가 없어 다행히 나이 어린 삼촌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위 보기에도 면목이 없고 동리 사람들 만나서도 한참 동안 민망한 ‘가물치 얼굴’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지매의 늦둥이 막내아들은 응석받이로 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아 부모의 속을 많이도 썩였다.
  아지매에게 한 가지 미안한 것은 이미 청년으로 성장한 막내의 취직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다. 아지매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어머니의 심부름을 겸해 병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아지매는 노골적으로 “나는 참말로 섭섭하데이”라고 말할 때의 그 표정이 내 가슴 속에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영남수필문학회 홈에서 퍼옴, 구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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