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추천 문학작품

고애자

죽장 2006. 4. 28. 10:18

고애자(孤哀子)
                                                         견 일 영

  애자(哀子)가 된 지 10년, 나는 결국 고애자(孤哀子)가 되었다. 영구차가 죽장동 산 밑에 이르고 내가 관을 따라 산길을 오를 때 섣달 하순의 찬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떡갈잎이 수북이 쌓인 이 길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올라가시고, 작은 아버지가 뒤를 따랐다. 어머니도 이 길을 따라 가셨고 아버지마저 이 길을 따라 가신다.
  내가 수없이 오르내리던 이 길의 마지막 손님이 되신 아버지는 당신이 손수 잡아두셨던 그 유택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멀리 금오산을 바라보며 자리를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잡았다. 할아버지는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으로 누워 계시니 아버지는 서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이제 내 위로는 다 떠났으니 나와 동생 다섯이 차례를 기다리며 줄서 있는 것만 같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산에서 고달픈 여행의 짐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남보다 몇 배 무거운 짐을 지고 아흔 한 해의 세월을 달려오시다가 이 산 아래 그 힘겨운 짐을 벗어 놓고 할아버지 무덤 아래 자리를 잡았다. 가을이면 지천으로 도토리를 떨어뜨리던 떡갈나무들이 바람 소리로 조곡한다. 하관을 하고 취토할 때 고애자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미련했던가. 내가 불효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관 위로 쏟아지고 그 죄목들이 낙엽처럼 떨어진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슴뼈가 미워지도록 우는 일 뿐이다. 그러나 잠시의 이 눈물로 후회스런 허물을 다 지울 수야 있겠는가.
  언제나 남보다 더 먼 길로 우회했던 아버지는 오히려 그 풍경을 즐기시곤 했다. 적어도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고달픈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것을 가치 있게 미화해 보여주셨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개탄하면서 힘들여 시속에 물들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천년 묵은 오동나무에서도 거문고 소리를 간직하며 절의를 지켰는데 나는 세습을 핑계 삼고 추운 날이면 매화 향기를 팔고 다녔다.
어릴 땐 잔소리로 들리던 말씀들, 젊어서는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만 들리던 아버지의 말씀들이 내가 살아오는 데 복음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미련한 자식은 이렇게 늦게 눈을 뜨는가.
  서랍에는 아직도 아버지의 병원 진료 예약서가 들어있다.
  − 2006년 1월 18일 15시 30분, 소화기 내과, T교수 −
  간호사의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랜 병상 생활에서도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않던 모습이 진료 예약서 위에 떠오른다. 평생 약속을 어기지 않던 아버지는 이 예약 일을 어기고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이제 다가올 긴긴 겨울, 후려치는 북풍 앞에 나는 발가벗은 채 떨고 있는 나목이 되었다. 언제나 칭찬과 격려와 밝은 내일만을 일러주시던 그 큰 산이 힘없이 무너지고 나는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선 나무가 되었다.
  며칠 있으면 아버지 생신이다. 돌아가시고 첫 번째 생신이니 꽃다발도 준비하고 멋진 케이크도 산소에 갖다 바치고 싶다. 그리고 이승의 연세만큼 촛불도 켜 드려야 겠다. “그 케이크 자시지도 않을 텐데 조그만 거 하나만 사가지고 갑시다.”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내미는 동생 말에 정말 아버지가 머나 먼 저승에 계신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버지가 들으셨으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아버지는 제사 때마다 큰 상을 두 개나 이어놓고 음식이 그 상 위에 꽉 차야만 만족해하시곤 했었는데. 떠나신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아 벌써 자식들의 마음은 이렇게 야박해지는가. 더 많은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누구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허사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스산한 바람에 떡갈잎이 마른 소리를 내며 흩어진다. 노을도 없이 회색빛으로 물든 서쪽 하늘에는 소인극이 끝난 가설무대처럼 씁쓸한 장막이 힘없이 내려지고 있다. 캄캄해진 밤하늘의 수많은 별 속에서 당신을 찾으려는 뒤늦은 회한이 가슴을 붉게 태운다. 고애자는 폭풍우 뒤에 오는 무지개를 그리며 상석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애곡한다.

                                                                                [영남수필문학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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