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귀신잡던 시절이여!

죽장 2023. 1. 21. 17:58

  귀신 잡는 해병이 된 친구 철이. 어느 날 갑자기 청룡부대원으로 선발되어 월남에 파병되었다. 손꼽아보니 53년 전의 일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국의 정글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친구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길고 긴 사연을 적어 빨간색과 파란색 테두리가 있는 항공 우편용 봉투에 접어 넣어 우체국으로 가고는 했다. 내용이라 해봤자 무지하게 덥다는 그곳에서 몸성히 지내다가 무사히 귀국하길 바란다는 상투적인 말에 주변의 분위기를 양념으로 버무린 것이 전부였다. 며칠 후 날아온 답장은 아직은 살아있다는 절박함이었다. 더러는 우정과 진심이 스며있는 긴 편지에 어깨가 잔뜩 올라갔다는 말을 앞세우고 헬기가 하늘을 찢는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가는 풍경에 가까이서 들리는 대포소리까지 담긴 명문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부상병의 아우성이며, 그리워하던 모든 것 내려놓고 세상을 마감한 전우도 있는 전장에도 시간은 흘렀다. 1년이 지났을까. 내가 쓴 편지가 얼마의 위문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철이는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해병전우회가 단결력이 강한 단체 중 하나로 소문이 나 있다고 했던가. 나는 33개월간이나 동고동락했던 군대 친구를 잊은지 오래건만 철이와 그 옛 동료들은 그렇지 않았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의 한 모임에서 월남 참전의 추억을 얘기하다가 사선을 넘어 살아 돌아왔던 땅, 베트남의 전적지를 방문하기로 합의가 되었다고 한다. 그곳은 그냥 추억의 땅이 아니라 그들의 일흔 살 생애 중 가장 의미 있는 곳이 아닌가.

    ..... 부대 주둔지 인근에서 꼬마 하우스 보이를 용케 만났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앳된 소년이 회갑을 넘긴 노인이 되었음에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본 반가움은 정말 남달랐다. 전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주머니에 든 현금을 털어 건네주었다. 또 호이안 거리의 한 길모퉁이에서 과일 좌판을 벌이고 있는 낯익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사병식당에서 조리 시중을 들었던 바로 그 새댁이었다. 온몸에 고달픈 삶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마냥 친절했던 미소의 기억이 반세기 시공을 건너뛰어 왔다. 다시 만날 기약 없이 헤어졌지만 전우들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사연과 함께 화려했던 무용담이 끝모르게 이어졌다 .....

 

  며칠 전 연말에 모처럼 만났다.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나는 또 철이의 무용담을 부추겼다. 여러 번 들었던 스토리였지만 이번은 달랐다. 맞서 싸웠던 세력들에 의해 통일된 나라에서 어쩌면 말 못 할 핍박을 받으며 지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추가된 해병의 가슴은 애잔함과 씁쓸함이 뒤엉켰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그날 소주맛은 하나도 쓰지 않고 오히려 달콤했다. 만취해 일어서면서 철이가 내뱉는다. 월남에서 받은 위문편지 중에서 멋진 여인과 소개팅을 준비해 두었으니 살아서 돌아오기만 하라는 당부가 최고로 영양가가 있었다나.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귀신 잡던 시절이여, 피 끓는 청춘이여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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