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실수로 스텝이 엉기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

죽장 2019. 3. 5. 22:20


  늦은 밤 리마공항을 이륙한 LA2467편이 좋은 공기란 뜻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에 닿은 것은 아침 6시였다. 그야말로 맛이 다른 공기를 마시면서 에비타가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 레콜레타를 거쳐 탱고의 발상지 라보카 거리로 향했다.
  빨간 장미꽃을 입에 물고 고개를 획획 돌리는 춤. 멋쟁이 신사가 아름다운 여인의 허벅지를 휘감는 듯한 춤. 두 몸이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하는 정열과 낭만의 춤 탱고가 조금 전 공동묘지 싸늘한 돌담 안에 잠들어 있는 미모의 여인 에비타의 운명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상상하는 잠간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라보카 거리는 입구에서부터 달랐다. 골목 양쪽에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이 온통 화려한 원색이었고, 길바닥에는 그림을 파는 좌판이 연이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걸으면서 이 도시가 어쩌다 탱고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이곳이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탱고의 거리가 된 연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세기 후반 라보카는 이민 온 유럽 노동자로 북적였다. 하루의 고단한 일을 끝내고 뒷골목 선술집에 모여든 그들은 피곤함과 향수를 달래기 위해 먹고 마시며 여인들과 어울려 정열적인 춤을 추고는 했는데 이것이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작이었다. 또 시 외곽의 강하구에 위치한 라보카 지역은 원래 활기 넘치는 항구였다. 당시 항구주변에 살았던 가난한 이민자들이 항구에 쓰고 남은 페인트를 집으로 가져와서 칙칙한 집들을 원색으로 칠하기 시작했고 당시 이 지역 화가였던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마무리해 다채로운 원색의 개성 넘치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작은 이민자들의 몸부림이고 눈물이고 절규였지만 이제는 세계인의 사랑을 많이 받는 춤이 되었다. 상가와 식당, 주점들이 빈틈없이 늘어선 골목에 탱고가 흐르고 있다. 작은 공간은 물론이고 카페의 귀퉁이에도 탱고를 추는 사람들이 있다.



    “실수로 스텝이 꼬이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
    실수로 넘어지면 그게 바로 삶이라오.”
  이것은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눈먼 퇴역장교 알 파치노가 실수를 두려워하는 젊은 여성과 탱고를 추면서 들려주는 대사이다. 탱고를 추다가 스텝이 꼬이면 서두르지 말고 한 템포 쉬면서 기다렸다가 중심을 맞추면서 다시 시작한다. 그래야 부딪히지 않고 다시  음악의 흐름에 맞춰 춤을 추게 된다. 인생도 그렇다. 긴 여정에 꽃길을 걷다가 천둥번개가 치게 되면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탱고의 스텝을 맞추면서 인생의 스텝도 배우게 된다.


  그날 저녁 우리는 거대한 탱고극장을 찾아갔다. 넓은 바닥에 놓여진 식탁마다 손님들이 빼곡하고, 정면의 무대에서는 현란한 탱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이 때로는 한이 서린 것처럼 슬픈 리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열정적인 두 다리의 예술이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과, 아래에서 이를 바라보는 사람이 함께 몰입하고 교감하고 소통하는 모습이 좋다. 탱고를 “육체로 쓰는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한 말이 어울린다.
  탱고의 여운을 뒤로하고 식당을 나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탱고를 추는 것 같이 보인다. 가로수에 기대어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는 연인들의 모습도 탱고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탱고의 거리를 걸어가는 내 머리에 ‘스텝이 꼬이면 탱고요, 실수로 넘어지면 그게 바로 삶’이란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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