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그녀가 없었다면 『동백꽃』도 태어나지 않았다

죽장 2018. 7. 17. 11:21

그녀가 없었다면 『동백꽃』도 태어나지 않았다



  언젠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경상북도만 보더라도 경주에는 김동리, 박목월, 청송에는 조지훈, 이문열이 태어났으며, 영양의 김주영, 김천의 정완영, 청도의 이호우 등 지역마다 훌륭한 문인들이 태어났는데 우리 구미에는 걸출한 문인이 배출되지 않아 아쉽다. 지역민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로 작용하고 있지만, 몇 년 전에는 god의 멤버 김태우가 있었고, 요즘에는 가수 황치열이 있으니 이들이 앞으로 구미를 빛낼 예술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급하기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박녹주 판소리명창이야말로 지역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가라 했다.

  박녹주는 1905년 고아읍 관심리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박기홍에게 판소리의 기본을 배운 뒤 21살인 1926년 일동축음기주식회사가 조선극장에서 개최한 명창대회를 시작으로 1969년 10월 15일 명동국립극장에서의 은퇴 공연까지 수많은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최고의 명창으로 군림했으며, 판소리 춘향가와 흥보가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여류명창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가 투박하고 꿋꿋한 소리제를 구사했던 것은 그가 남자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던 데 가장 큰 이유가 있겠고, 또 그가 타고난 성음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가 그를 강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전라도 지역이라서 전라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산에서 태어난 박녹주는 경상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남성을 능가할 정도의 통성을 위주로 해서 소리를 끌고 나가며 소리 맺음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고 분명하다. 박녹주의 소리는 마치 할머니가 손자에게 옛날 얘기를 들려주는 분위기가 나서 무척 정감이 간다. 별로 힘 안들이고 쉽게 부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엄청난 공력을 내보인다.
  박녹주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1905년 1월 25일(음)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번지에서 아버지 박중근과 어머니 권순이 사이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박명이였다. 농사를 많이 짓는 편이어서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으나 아버지가 한량이어서 집안일은 어머니가 감당했다. 그러나 호적에는 1905년 2월 15일생으로 되어 있고, 아버지는 박재보, 어머니는 박순이로 되어 있다.
  박녹주는 부친에게 토막소리를 배우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험난한 소리꾼의 길에 들어선다.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에 나선 것은 12세인 1916년으로 선산에 온 협률사 공연을 본 부친이 목소리가 쟁쟁한 딸을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때 마침 선산 해평의 도리사 부근에 머물고 있던 박기홍 명창에게 보냈던 것이다. ‘녹주’라는 예명도 이때 부친이 지어주었다.  박녹주는 또 “내 나이 스물넷이 되던 1928년 봄에 인사동에 있는 조선 극장에서 팔도 명창 대회가 열렸다. 전국의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다시피 한 이 공연에서 나는 재창, 삼창, 사창을 하기에 이르는 인기를 얻었다. 이 무대는 내 평생의 그 수많은 무대 가운데에도 가장 잊지 못할 무대가 되었다. 그 공연이 끝나자 세 사람의 남자가 나를 찾아주었다. 한분은 인촌 김성수 씨의 생부인 김경중 영감이었고, 또 한 사람은 나에게 남자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사천 신 씨였으며, 세 번 째 사람은 연희 전문학교에 다니던 김유정이라는 학생이었다. 김경중 영감은 그때에 이미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였다. 이 갓 쓴 노선비가 내가 사는 관철동 전세집에 찾아와서는 ‘한 나라의 명창이 이런 셋집에 살아서 쓰겠나’ 하며 굳이 집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몇 번이나 사양하던 끝에 결국은 그분이 사 놓은 수운동의 삼천원짜리 한옥으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한량인 부친이 정해 놓은 소리꾼의 길을 가는 동안 복잡한 가정문제와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적 고통 등이 뒤엉킨 삶 속에서 꿋꿋하게 소리를 지키며 살다가 19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우리 곁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이 나라 최고 명창 박녹주. 어디선가 구수하고 매력 있는 아니리에서 느린 진양조로 이어지는 박녹주 명창의 「흥보가」가 들려온다.

          흥보가 들어오며
          “여보 마누라. 아 이렇게 울지만 말고 저 지붕 위에 있는 박을 따다가
          박 속일랑 끓여먹고 바가지랑는 부잣집에 팔아다가
          아 어린 자식들 살리면 될 것 아니오.“
          “아이고 그럽시다.
          여보 영감 좌우간에 박 따다가 우리 한 번 타봅시다.“
          그때여 흥보 내외가 박 세 통을 따다놓고 우선 한 통을 타는디 (아니리) 

          “시르렁 실건 당겨주소
          에이여로 당겨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은
          아무 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이로구나
          에이여루 당그여라 톱질이야“ (진양조 박타령)


  박녹주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봄봄’ ‘동백꽃’을 지은 춘천 출신의 소설가 김유정이다. 몇 년 전 친구들과 강원도 춘천에 갔다가 우연히 들렀던 「김유정문학촌」에서 박녹주 명창과 소설가 김유정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춘천 「김유정문학촌」 한쪽에 있는 젊은 시절의 박녹주]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 가을 어느 날, 김유정에게 운명 같은 일이 벌어졌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간통집’으로 막 들어가던 김유정의 눈에 여탕문이 열리면서` 나오는 젊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김유정은 한동안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첫눈에 반한 것이다. 그 다음 날에도 ‘목간통집’ 근처를 서성대다 그녀를 발견하고 뒤를 밟았다. 그녀가 바로 기생 박녹주였다.
  첫눈에 반한 김유정은 밤마다 연서를 써 보냈으나 도무지 답장이 없었다. 김유정은 박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고, 그녀의 공연장을 찾아가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지만 박녹주는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다른 사람의 소실이 되어 있는 몸으로 김유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당신은 학생이고 나는 기생이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점잖게 타일러 돌려보냈다. 그러나 김유정은 그 후에도 혈서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박녹주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할 정도로 병적으로 변해갔다. 연모의 감정이 복수심으로 바뀐 것이다.

  소설가 김유정의 빼어난 문장은 박녹주와의 사랑이 실패한 덕분에 탄생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실연의 고통은 술을 탐닉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불치병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둘의 사랑이 결실로 맺어졌다면 김유정은 더 오래 살았겠지만 『동백꽃』과 같은 소설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훌륭한 문학 작품의 탄생 여부도 그렇고, 나아가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김유정은 집안의 몰락과 실연을 겪으면서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심히 괴로워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해 소설을 썼다. 정신적 육체적 비극이 오히려 창작의 불씨가 됐다고 할까. 박녹주는 김유정을 끝내 뿌리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지 “너무 박절하게 대해 내가 평생 슬하에 자식이 없이 살았나 보다. 손이라도 한번 잡게 해 줄 것을…”이라고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매년 구미시가 주최하고 (사)박녹주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전국국악대전」은 미래 국악을 이끌어갈 젊은 국악인의 등용문으로 우리나라 국악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올해에도 제18회 국악대전이 지난 5월 구미문화예술회관과, 구미강동문화복지회관에서 개최되었다.


                                                 [박녹주 여사 기념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하루 날을 받아 박녹주의 흔적을 찾아 고향 땅 선산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선산읍 노상리마을회관 앞에는 「박녹주 여사 기념비」가 시름없이 비에 젖고 있었다. 바로 옆 정자에 하릴없이 앉아 있는 노인들이 눈총을 쏘아댄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기념비의 사진을 찍고, 이리저리 유심히 살피고 있는 이방인의 낌새가 수상해서 그럴 것이라 짐작한다. 기념비 뒷면에 명창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남긴 글 ‘人生 百年’이 새겨져 있다.  


          인생백년이 어찌 이리 허망하냐
          엊그제 청춘 흥안이 오늘백발이로다

          인생백년 벗은 많지만
          가는 길엔 벗은 없어라

          그러나 설워마라
          우리의 가는 길은 그지없으며
          인생무상을 탓하지 않으려니.


  녹주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년. 희미해져가는 그녀의 흔적이 있는 선산을 출발하여 그녀가 탄생한 관심리를 지나며 나라를 울릴 예인의 탄생을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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