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선택한 어머니의 마음
죽장사(竹杖寺)는 내가 태어나 자란 동네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절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빨리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5층 석탑이 있는 동네라고 말하면 한마디로 끝이었다. 어떤 때는 그 탑이 국보라는 자랑까지 덧붙이지만, 사실 죽장사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것은 별로 없다. 탑의 규모로 볼 때 크고 화려한 절이었으리라는 짐작만 할 뿐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는 시가 있다.
竹杖菴邊古樹攢 죽장암변고수찬
石槃猶鎭壽星壇 석반유진수성단
聖神今日輝南極 성신금일휘남극
負海人將指點看 부해인장지점간
죽장암 가에는 고목들이 빽빽이 서 있는 데
석반은 아직도 수성단을 누르고 있네
성신이 오늘도 남극성에 빛나니
변방인들이 장차 손으로 가리키며 보리라
- 이택용 《구미사랑, 역사이야기》 중에서 -
김종직이 선산도호부사로 근무할 때 지은 『선산지리도 10절』 중 다섯 번 째로 나오는 시이다.
어릴 적에 들었던 탑이 지어진 내력과 관련된 설화 2토막이 생각난다. 한 여인이 슬하에 남매를 두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을 만큼 힘이 세어서 힘을 주체할 수 없을 때에는 서로의 힘을 겨루어보기도 하였다. 나이 스물 안팎이던 어느 해 오누이는 심한 의견 충돌 끝에 힘을 겨루어 이기는 쪽이 지는 쪽을 죽여 버리기로 했다. 아들은 오십 리나 떨어진 금오산 중턱에 있는 큰 돌을 가지고 오고, 딸은 열두 자 높이의 돌탑을 쌓아 올리기로 약속했다. 이튿날 아침 해뜨기 전까지 먼저 끝내는 쪽이 이기게 되는 시합이었다. 날이 밝자 딸은 탑 꼭대기에 돌을 얹었으나 아직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늦게야 돌아오고 있던 아들은 동네 어귀에서 멀리 동생이 쌓아놓은 탑을 보고는 죽는 것이 두려워 그만 바위를 그곳에 던지고 멀리 도망을 갔다.
또 다른 하나의 스토리는 이렇다. 선산 땅 어느 집에 남매가 사사건건 투닥이며 살았다. 계집답지 않게 씩씩한 동생이 여리여리하게 생긴 오빠에게 탑 쌓기 겨루기를 청했다. 여동생은 죽장사에 5층탑을 쌓았고, 오빠는 이곳으로부터 차로 30여분 떨어진 거리의 해평면 낙산리에 3층탑을 쌓았다. 구미시 관광 홍보 자료
죽장리 5층 석탑과 낙산리 3층 석탑은 크기나 생김새가 사뭇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석탑의 양식이 모전석탑 유형이라는 것 정도이다. 결론은 힘겨루기에서 오빠가 누이동생에게 졌음은 물론이다.
나는 전해오는 이 스토리를 사실로 믿었다. 여동생이 만든 탑은 현물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릴 때 탑의 아랫부분에 있는 감실에 들어가 장난치며 놀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빠가 운반해 오다가 버렸다는 거대한 돌이 우리 집 옆에도 있었고 등교 길에도 몇 개나 있었다. 그 돌은 아이들 몇이 올라가 놀아도 될 만큼 컸으며, 둥글게 마모된 자연석이 아니라 정으로 쪼아 다듬은 듯 대체로 모가 나 있었다. 석탑은 국보 130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들판에 있었던 돌들은 어느 날인가 치워지고 없다.
모처럼 죽장사를 찾았다. 차에서 내리니 초여름 밤꽃 향기가 진동한다. 꿈결인 양 드려오는 뻐꾹새 울음소리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영겁의 세월을 지키는 오층석탑이 성큼 다가선다. 이끼 낀 탑신 여기저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붕들의 아래, 윗면은 벽돌을 쌓아올린 것처럼 계단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에 기둥조각을 새기지 않은 탑신의 몸돌이나 지붕들의 모습은 전탑 양식인 모전석탑이다. 웅장하고 세련된 통일신라 석탑의 우수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천천히 탑을 따라 돌면서 살펴보면 넓은 기단은 땅에 굳건히 뿌리내려 한껏 안정되어 있고, 그 위에 세워진 몸체는 장중하다. 안정적인 비례에 완벽한 체감률까지 겸비하고 있다. 딱딱하거나 위세를 부리는 모습이 아니라 곱고 섬세하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기품 있는 신사의 멋들어진 풍모다.
衙罷乘閑出郭西 관청 일 파하고 한가로움을 타고 성 서쪽으로 나와
僧殘寺古路高低 승려는 적고 절은 오래됐는데 길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네
祭星壇畔春風早 별에 제사 지내는 제단 옆에 봄바람이 이르니
紅杏半開山鳥啼 붉은 살구꽃은 반쯤 피고 산새가 우는구나
고려조에 선산에 지선주사(知善州事)로 근무했던 정이오(鄭以吾, 1347~1434)가 1394년쯤에 쓴 『죽장사』라는 한시이다. 관청 서쪽 2km 위치에 제단이 있었다는 사방마을과, 살구꽃 피고 새우는 고향마을 풍경이 그려진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설화를 다시 생각해 본다. 앞의 것은 오빠가 금오산 중턱의 돌을 깨어오는 것이었고, 뒤의 것은 서로 다른 곳에 떨어져서 탑을 쌓는 것이라는 차이일 뿐 전후의 사정은 대부분이 비슷하다. 그런데 설화 속의 어머니는 왜 남존여비의 낯익은 당시 풍속을 뛰어넘어 딸의 편을 들었을까? 오빠에게 주어진 과제는 금오산 중턱의 돌을 나르는 일이었으니 처음부터 공정하지 못한 경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화에는 “성질이 아주 사납고 괴팍스러운” 어머니라고 전한다. 딸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아들을 먼 곳까지 심부름을 보내는 모난 성격의 어머니라면 그의 의식 속에는 죽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 크거나, 아들을 싫어하는 남성혐오증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아들은 어머니 가슴 속에 살고 있는 죽은 남편의 그림자이고, 누이동생은 어머니 자신의 자아이다. 평생 동안 해로하지 못하고 일찍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스럽기도 했으리. 사랑의 결핍은 한 여인의 성격을 사납고 거칠게 만들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이 아들을 버리고 딸을 택한 이유라 추측해본다.
애초에 그들에게 탑이란 무엇이었을까. 멀리 있으되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같은 것이고, 현실로 가까이 있으나 결코 지워지지 않는 욕망이기도 했으리. 죽장사 5층 석탑은 남성을 향한 원망의 결정체이자 피안의 세계에 다가서는 평안이었으리라.
내 고향 선산 땅은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도개와는 지척이니 여기 큰 절이 있었음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오늘 내 눈에는 오누이간의 경쟁도, 삐뚤어진 모성애도 아닌 위대한 선열들이 남겨준 찬란한 유산일 뿐이다. 돌아오는 길, 내 두 눈은 큰 돌이 있던 자리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 내닫는 차창에 석탑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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