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비봉산을 오르다

죽장 2018. 7. 3. 13:37

비봉산을 오르다


  어갱이마을에서 태어난 박선배, 곰실 출생의 김시인, 이문동에서 자란 장교장, 그리고 죽장에서 태어난 나까지 합해 4명은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선산중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다. 평생 동안 교직에 있다가 졸업하였을 뿐 아니라 올망졸망한 문학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 도반들이다. 우리 넷은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비봉산에 가보자고 의기가 투합되었다. 4월 30일 그날 가족까지 동반하여 8명이 군청 앞 ‘황태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하였다.




  군청은 예나 지금이나 늘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95년 구미시와 통합시군이 되면서 군청은 사라지고 「구미시선산출장소」라는 낯선 이름의 관청으로 바뀌면서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마당에 서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서 놀던 기억도 생생한데 지금은 선산의 영화를 빠짐없이 알고 있는 해묵은 회나무만이 반갑다며 맞아준다. 그 때 함께 놀던 아이들은 산지사방 흩어져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겠지. 모든 것이 낡은 풍금소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건만 황태집의 황태구이 정식은 고향이며 어린 시절을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김원호 시인의 싯귀가 언제나 친근했던 소나무의 솔방울처럼 와닿는다.


           비를 맞으며 온 거리를 헤매도
           소나무를 찾는 사람뿐
           소나무를 아는 사람은 없고
           내 유년의 빛 따라
           그 자리로 다가가 보면
           어느새
           소나무는 저만큼 가 버리고
           밋밋하고 귀 없는
           양송, 백송, 히말라야시다의 행렬

          - 김원호 시집 《그리운 여백》 중 「솔방울을 찾다가」 부분-


  선산을 감싸고 있는 비봉산은 이름답게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긴 목을 뻗어 마치 하늘을 오를 기상이다. 왼쪽 날개인 동쪽의 교리 뒷산, 오른쪽 날개인 서쪽의 노상리 뒷산이 한 눈에 보인다. 옛 선산군청사가 봉황의 입이 있는 위치이다. 

  아득한 옛날 고을을 지키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봉황이 날아가 버리면 선산의 기운이 죽을 것을 두려워했다.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앞쪽에 있는 고아면 황당산에 그물을 쳐서 망장동 또는 대망동이라 불렀으며, 봉(鳳)은 수컷이요, 황(凰)은 암컷이기 때문에 봉황의 짝을 지어 주기 위해 물목동네 뒷산을 ‘황산’으로 지었다. 또 선산고을 사방동네를 죽장(竹杖)이라 하여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열매로 먹이를 대어주었으며, 동쪽동네는 봉황이 좋아하는 만화백조와 즐겁게 놀도록 화조동이라 했다, 그 외에도 봉황을 맞이하는 영봉리, 봉황이 날아오르는 무래리가 선산이 봉황의 고장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 선산군지 -


           오랫동안 안으로만 머금던 뜨거운 말씀
           올올이 풀어내고 있다
           눈부신 세상
           얼마나 피나는 시작 되풀이 했으면
           얼마나 뜨겁게 오래 담금질 했으면
           저토록 모남 없이 둥글고 부드러울까
           한 손에 부채 들고
           또 한 손에 박사치마 모아 쥐고
           빙글빙글, 훨훨 깃을 치는
           한 마리 단정학

- 박태환 시집 《살아 있는 악기》 중 「춤추는 여인」 부분-


  박선배가 노래한 '한 마리 단정학'이 비봉산에 머물고 있는 봉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방동네에서 태어난 나는 날마다 영봉리를 지나서 비봉산 아래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봉황과 함께했던 유년시절이었다. 오늘 비봉산에 올라 한껏 왜소해진 몰골로 변해버린 마을을 내려다보니 어릴 적 들었던 깊고도 튼튼했던 선산의 뿌리가 생각난다.
  철없던 시절에도 선산에서 태어났다는 긍지 같은 것이 가슴 속에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굴곡은 차치하고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도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되리라.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되면서 이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선산사람 장재성 시인의 생각도 비슷하리라 짐작한다.


           여름 지나 발밑에 낙엽이 밟히는 날 그들이 세상을 비출 줄은 몰랐다.

           볼품없이 스러져 가는 나뭇가지 사이로 삐죽이 얼굴 내미는 풀이 쑥부쟁이인지 구절초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찢기면서도 땅속에서 또아리 틀며 지낸 인고의 삶은 생각도 못했다.

           우리는

- 장재성의 시 「우리는」 부분, 《선주문학》 36집-


  ‘부처바위’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다. 선산읍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서울이 될 뻔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 선산군지 -


 서남쪽으로는 산성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남쪽과 동쪽에는 감천과 낙동강이 각각 흘러서 적을 방어하기 좋으며, 멀리 금오산, 냉산과 함께 갈미봉 아래 자리 잡은 지형은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 아주 적합한 천혜의 요새다. 그러나 어쩌랴. 골짜기가 백 개에 하나가 모자라 서울이 될 수 없는 것을. 선산 앞 들판에 날아오다 떨어진 동산이 줌 카메라 조리개를 끌어당긴 양 성큼 다가선다.
  계절은 딱 이맘때인데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나물 캐러 나섰던 처녀들이 들었던 우렁찬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금오산 저편에서 갈미봉까지 뻗어 있던 쌍무지개가 여기 어디쯤 닿았을 것인데.....

  꿈속을 헤매고 있는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백 편의 시를 능히 외고 있는 박선배가 내려가자며 소매를 당긴다. 김삿갓이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며 다니던 어느 날 선산 고을에서 마셨다는 ‘선산약주’가 기다린다고 한다. 비봉산의 수려한 계곡 단계천의 찬물과 솔잎과 찹쌀을 머무려 찐 고두밥으로 만든 향기 짙은 황갈색 약주 한 잔이면 김삿갓도 부럽지 않으리. 어디선가 어릴 적 뜻도 모르고 즐겨 불렀던 ‘방랑시인 김삿갓’  가락을 흥얼거리며 비봉산을 내려온다.

- 대중가요, 명국환 노래 -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개나리 봇짐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