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어버이날에 부부의 날까지 있는 5월에 다소 불경스럽기는 하지만 가정에서의 문제나, 가족 사이의 사랑을 생각해본다. 평균수명이 급속도로 늘어나서 최고령사회가 눈앞까지 다가왔다고 한다. 태어나는 신생아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줄어들고 있어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결혼하는 숫자보다 이혼하는 숫자가 더 많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가정과 사회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부부간,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전선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부부로 맺어져 갖은 사랑하고 때로 싸우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지만,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모양새도 예전과 달라졌다. 또 모든 자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자식들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려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행복보다는 부모가 가진 재산이 어디로 흘러가는지가 중요하며 자신들이 받게 될 주변의 눈길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오래 전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난다. 이국적인 분위기도 좋았지만 중년에 들어선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결말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하며 아주 재미있게 보았었다.
베란다에서 카펫의 먼지를 털던 프란체스카는 길을 묻기 위해 자신의 집 앞을 지나던 「내셔널 지오그라피」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와 마주한다. 그가 찾던 곳을 알려주기 위해 트럭에 오른 프란체스카. 그때부터 이들의 관계는 깊어지기 시작한다. 차 한 잔에서 저녁식사, 브랜디 타임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각자의 꿈과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중년 남녀. 특히 한 가정의 엄마와 부인으로서만 살아오던 여인에게 자존감을 불어넣어주는 남자의 말은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여자에게 용기와 자존감을 심어주는 남자는 당시 세상에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야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1965년을 중년으로 살았던 여인은 보기 드문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요즘말로 이 상남자와의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프란체스카는 그와의 일탈을 행한다.
그때부터 영화는 여주인공의 내면 갈등에 집중한다. 별 탈 없이 살아가고는 있지만 단조로운 삶에 지쳤던 그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일탈을 꿈꾸지만 그렇게 되면 가정이 무너질 것 같고 좁은 마을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다. 결국 그 둘은 서로의 감정을 억누르며 이별한다. 일탈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녀는 죽을 때까지 짧았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으리라.
영화의 여주인공이 '사랑' 때문에 잠시라도 갈등을 느꼈듯이 누구에게나 불현듯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 수 있다. 미래를 정확히 판단해놓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닌가. 다만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선택만이 가로놓여 있을 다름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 큰 차이가 없을 때에도 갈등을 느끼겠지만 그것들 모두에 대한 욕망이 클 때도 우리가 느끼는 딜레마의 골은 깊어지게 된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또 다른 풍속도는 자식들이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평생 동안 고락을 함께 해왔던 부부도 나이가 들면 누군가는 먼저 떠나게 된다.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남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하는가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중년의 사랑이 주제인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완벽한 가정, 빈틈없는 부부관계도 경우에 따라 흔들릴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한다. 가정의 기둥 역할을 포기하고 새로운 행복에 안착하게 되면 기존의 집이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다. ‘부부의 사랑’과 또 다른 ‘남녀의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보는 듯하다.
또 세상은 이미 노부모를 지성으로 모시는 효도가 중요한 덕목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나이든 어른들은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려고 허리띠 졸라매는 시대는 갔다고 반격한다. 며느리집에서 키우고 있는 반려견보다 후순위라는 자조적 신세타령이 유행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황혼이 짙어오는 인생의 고갯마루에서 좌우앞뒤를 살펴본다.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전통적으로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처럼 부부의 위치가 일시 흔들리다가도 대개의 경우 원위치로 돌아가고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식을 보면서 품안의 사랑이란 말을 절감하고 있다. 일찍이 없었던 황혼이혼이니 졸혼이니 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 아름답기로 으뜸이라는 ‘사랑’도 겉모양은 물론이고 내면의 품질까지 변하고 있다. 세월이 더 흐르면 인간들이 보석같이 품어온 지고지순한 사랑은 빙하 속에서 냉동상태로 발견되거나 돌보다 단단한 화석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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