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나는 고백한다

죽장 2018. 5. 1. 19:50

   살구꽃 피는 계절이 되면 연례행사로 다가오는 풍경이 있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십여 년, 내 나이 일흔 고개를 넘고 있는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봄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밭 풍경이며, 풍경 속에서 웃음 짓고 있는 예쁜 소녀 순희의 모습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초가 울타리 안에는 늙은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살구꽃이 지고나면 이파리 뒤에 살구가 숨어 굵어지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소년의 돌팔매질에 봉창문이 덜컥 열림과 동시에 할머니의 고함이 뒤따라 튀어나오면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을 간다. 한참 후 순희가 떨어진 풋살구 몇 알을 주워 들고 다가왔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순희네 집 울타리를 맴돌던 추억의 시계는 고향마을 어귀에서 멈추지 않고 장면을 바꾸어 철부지 시절을 향해 계속 돌아간다.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고무줄을 끊어 놓고 도망쳤었고, 어떤 때는 뒤로 살며시 다가가 치맛자락을 들추기도 했었다. 도회지에 있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우리 결혼하자고 약속했던 일까지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고무줄 끊어놓고 도망간 죄, 치맛자락 들치며 성희롱을 한 죄, 더구나 우리 다음에 커서 결혼하자며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한 죄까지 지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잘못인 줄 몰랐었다.

 

   ‘미투(Me Too)’ 열풍이 나라를 들썩거리게 하고 있다. 팔순의 노 시인도 미투의 불길에 쌓여 말년의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이 바람이 바다 건너 미국에서 불 때는 잠시 타오르다 꺼지려니 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일기 시작하면서는 문학, 연극, 영화, 정치, 교육계를 막론하고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번지고 있다. 날마다 언론 보도를 보면서 내일은 또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타오를까를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한번 붙은 불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제는 그 내용과 방향에 대하여 참여하고 비판하면서 깊이와 폭을 따지게 된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그동안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 내가 당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누군가 내 얘기를 공감해 줄 것을 믿기 때문에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 곁을 스치고 있는 미투 바람을 보고 들으면서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들만의 행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5월이다. 올해 유난히 살구꽃이 피었던 고향이 생각나고, 풋살구를 전해주던 소녀가 그리워진다. 어른이 되어 바쁘게 살면서도 가끔은 어디로 시집을 갔는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어쩌다 오가는 길에 한번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누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본 적도 있다.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다. 살구꽃 이파리가 봄바람에 흩어지고, 청보리밭 푸른 물결 일렁거리는 꿈속의 고향이 아닌가. 고향마을이 가까워지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아니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 만은 .....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하는 노래가 저절로 나오지 싶다. 굽이진 산길을 돌고돌아 순희네 집이 가까워지면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 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하며 박목월의 산도화가 튀어날지도 모르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고무줄 값은 이자를 포함하여 후하게 계산하여 변상하고 싶다. 또 치맛자락을 들췄던 일은 진정으로 뉘우침의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러나 보상하고 반성하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 도회지 학교로 진학하여 떠나면서 장래를 기약했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댓가는 어떻게 치루어야 할까. 멀리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기만해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고는 했다는 고백 정도로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순희네 집이 있었던 자리에서 코흘리개 시절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용서를 빌고 싶다. 반 세기동안 깊고도 넓은 세월의 강을 건너오면서 하지 못했던 풋풋한 사랑을 고백하면 웃음이 나올까, 눈물이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