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퇴직 전 마지막 근무지가 경상북도 왜관이었다. 그 곳에는 6.25 전쟁 당시 폭파되었던 낙동강 철교가 가까이 있는가 하면, 최고의 격전지였던 다부동, 유학산이 지척이다. 요즘은 낙동강의 칠곡보 옆에 전쟁기념관이 세워져 있어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누구나 그날의 아픔을 느낄 수 있고, 교훈으로 삼아 배우기도 한다.
그때도 6월이었다. 군부대로부터 유해 발굴 현장의 견학을 안내하는 공문이 왔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현장을 꼭 봐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그렇게 찾게 된 유학산은 표면으로는 세월의 흐름에 묻혀 전쟁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설명이 없으면 우리나라 야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잡목들이 욱어져 있고 여기저기 무덤들이 있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유학산은 결코 그런 산이 아니었다. 어디쯤엔가 국군의 녹슨 철모나 군화조각이 묻혀 있다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 골짜기 어디쯤에 군복을 입은 젊은이가 조국을 외치며 숨져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바위보다 무거웠고, 얼굴을 적시고 흘러내리는 땀보다 뜨거웠다. 이날 유학산을 다녀온 후 『유학산 사연』이라는 짧은 글을 지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은 300~400년 이전의 일이지만 역사책에 기록해두고 배우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교훈으로 삼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요즘도 다부동 유학산을 지나고 낙동강을 건너 고향길을 오가며 전쟁의 비극을 상기하고는 한다. 6.25 전쟁이 일어났던 그때 나는 첫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였다. 어머니와 누나의 등에 업혀 집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까지 피난을 갔었다. 어릴 적부터 전쟁이야기를 숱하게 들으며 자라서인지 해마다 6월이 되면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2010년 3월 26일 밤 9시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을 받아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었다. 북한은 또 그해 11월 23일 오후 2시에 연평도에 폭탄을 퍼붓기도 했다.
70년 전의 6.25를 잊지 않고 있는 우리, 8년 전 서해의 천안함과 연평도가 공격을 당하는 현실은 지켜야 할 조국이 있음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이 나라는 우리가 살다가 묻혀야 할 곳인 동시에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땅이다. 전쟁의 비극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국가의 책임은 어떤 것이며, 어디까지가 국민의 의무인지 새삼스럽게 자문자답 해보고는 한다. 그기에 나라사랑의 단초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던 일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하게 많았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6일 전쟁’에서 대승하였다. 당시 전쟁이 임박했을 때 이스라엘 국방장관 모세 다얀 장군의 방송음성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외국에서 유학 중이던 이스라엘 청년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짐을 싸서 고국으로 향한 반면 아랍연합국 유학생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 몸을 숨기기 바빴다. 결과는 뻔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병을 합친 2천 3백명의 병사가 왜군 3만 여명을 크게 물리친 행주대첩에서는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은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도왔던 결과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에도 재일학도의용군 1진 69명이 참전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641명이 자발적으로 참전해 그 중 135명이 전사했으며, 포항여중을 지킨 71명의 학도병을 시작으로 6·25전쟁에 참여한 학도병이 무려 27만 4000여 명에 이른다. 또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공격 직후 실시된 해병대 지원율이 급증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조국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순수한 애국심의 실증이다.
이제 오늘의 우리를 생각해본다. 최근 북한의 핵문제로부터 시작된 남북간의 대화는 상호 이해관계가 밀접한 주변국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간 밀고 당기며 손익계산이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인들의 이목이 한반도에 쏠리고 있다. 반만년 역사에서 숱하게 겪었던 전쟁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이 상황의 극복에 슬기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나라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 내 자신이 소중하다면 나라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를 사랑하는 길이다. 나라 사랑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의무적인 행동보다 필요시 자발적인 의지가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행주산성에서 치마에 돌을 날랐던 아낙네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 나라, 다부동 유학산에서 목숨 바쳐 조국을 지켰던 청년들의 영혼이 살아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우리의 머리에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지가 있고, 가슴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학교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앞에 두고 “네가 다 자라면 그때는 전쟁도 없을 테니 군에 가는 일도 없을 거야.”라는 말씀을 자주했다. 오늘은 저승에 게신 어머니에게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이 나면 맨주먹에 돌이라도 집어 들고 나설 테니 걱정 말고 편히 계시라.’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랑스러운 조국을 생각하게 되는 유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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