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순간이동의 맛을 보다

죽장 2018. 12. 26. 21:13

  이카(Ica)로 가기 위해서 다시 쿠스코(Cuzco)를 거쳐 리마(Lima)로 나왔다. 버스로 270여 km 거리를 이동하는 내내 오른편으로 태평양을 끼고 척박한 땅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소형승용차 티코 택시가 거리를 수놓고 있는 마을 이카 마을 한쪽에 와카치나(Huacachina) 오아시스가 있다. 야자나무를 배경으로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모래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그림 같은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모래바람을 막을 수 있게 수건을 뒤집어쓰는 등 단단히 채비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모래언덕을 오르내리는 차들과 사막 풍광을 즐기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퀴가 덩그렇게 큰 빨간 차였다. 현지요원이 다가와 안전벨트를 매어준다. 차가 뒤집어져도 좋을 만큼 전신을 단단하게 동여매는 것 같다.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감정으로 휩싸인다. 출발해도 좋다는 신호와 동시에 차는 굉음과 함께 모래 먼지를 내품으며 내닫는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전신이 뒤로 쏠리다가 내리막 급경사를 탈 때는 몸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곡예운전이 계속된다. 심한 흔들림 속에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몸과 몸이 엉키고 부딪친다.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기 몇 번이었던가. 정상에 도착하니 하루 일을 마치고 산을 넘어가려던 태양이 멈춰서 맞아준다.



  초급과정 위치에 내렸다. 사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샌드보드가 하나씩 배정되었다. 보드바닥에 양초칠을 해서 내려놓고는 “배를 깔고 엎드려서 두팔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으고 손으로는 끈을 꼭 잡아야 하며, 다리는 자연스럽게 뻗고 힘을 빼는 것이 요령의 전부”라며 설명을 한다. 그 후는 보드에 몸을 맡기면 자연스럽게 바닥까지 미끄러지게 되어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준비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몸이 아래로 미끄러진다. 긴장을 풀 여가도 없이 바닥에 닿았다. 눈을 뜨니 사방이 고운 모래다. 달콤한 꿈결처럼 어디선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잠시 세상 밖으로 순간이동을 했다가 돌아온 것 같다. 비로소 현실감과 함께 작은 성취감을 느껴진다. 눈앞의 모래언덕이 눈에 들어오고, 입안에는 모래가 씹힌다.
  햇살이 비치는 부분과 그림자부분이 선명하다. 낮은 곳에서 비치는 햇살 때문에 명암을 가르고 있는 능선이 날카로운 선이 되어 있다. 어쩌면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날아가는 듯하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도 한조각 보드를 타고 내려온 순간이겠지. 이승과 저승의 경계 또한 저 능선처럼 바람불면 흩어지는 가는 선이겠지. 그 곳의 맛이 있다면 아마도 입안에서 씹히던 모래의 맛과 같을까? 낮 동안 이글거리며 타올랐던 태양이 이카의 모래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와카치나 사막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018.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