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1. 조선일보 만물상]
0.01초
아주 긴 시간을 '겁(劫)'이라고 한다. 하늘의 선녀가 천년에 한 번 땅에 내려와 집채만 한 바위를 옷깃으로 한번 스치고 올라간다. 그렇게 해서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겁이다. 반면 아주 짧은 시간을 찰나(刹那)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語)에서 온 불교 용어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어떤 계산법에 따르면 0.013초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다.
▶평창에서 벌어지는 동계올림픽은 찰나의 게임이다. 일본은 피겨 간판 하뉴 유즈루가 환상적인 4회전 점프 기술로 첫 금메달을 선사해 열광하고 있다. 보통 4회전 점프에 드는 체공(滯空) 시간은 0.6~0.7초다. 이 시간에 스케이터는 점프 높이, 회전 속도, 몸의 기울기 등을 완벽하게 계산해 얼음 위로 내려와야 한다. 조금만 삐끗하면 나동그라지고, 환희와 좌절이 갈라진다.
▶평창에서 찰나의 승부를 보여주는 드라마들이 잇따르고 있다. 그제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한 한국의 차민규가 우승을 눈앞에 뒀다가 0.01초 차이로 노르웨이 선수에게 금메달을 내줬다. 남자 봅슬레이에서는 독일과 캐나다 팀이 3분16초86으로 0.01초까지 똑같아 공동 우승을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은메달 확정 후 차민규는 "0.01초의 의미가 뭔가" 묻자 "(나의) 짧은 다리"라고 했다. 신체 조건이 좋았으면 1등도 가능했을 거라는 아쉬움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고 은메달은 충분히 값지다. 봅슬레이의 경우 이틀 동안 네 차례 달린 기록을 합산한 성적이 어떻게 이렇듯 완벽하게 같을 수 있는지 놀랍다. 이걸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상화는 100m를 통과한 후 '오늘 됐다' '오늘 이긴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 코너에 진입한 순간 왼발이 살짝 삐끗해 손해를 본 시간도 찰나였을 것이다.
▶4년을 피땀 흘리며 훈련한 선수들에겐 짧게는 몇십 초, 길게는 단 몇 분에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가 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출발 신호가 울린 지 1초도 안 돼 넘어진 불운한 선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꿔보면 평창의 선수들은 0.01초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역경과 시련을 넘은 사람들이다. 0.01초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나 생각하면 한순간 한순간 보내는 시간의 의미가 새삼 숙연하게 다가온다. 정상(頂上)의 대결이란 각자 모든 노력을 다한 후 찰나의 순간 맞붙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