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나도냉이

죽장 2017. 6. 9. 10:38

나도냉이

 

트랙터마차에 올라탔다. 그것은 서부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것으로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출발하니 길옆에 군락을 이루고 피어있는 나도냉이가 아는 척을 한다. 넓은 초지에는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멀리 보이는 능선에서는 풍차가 바람소리를 내며 돌고 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 몇 점이 떠있는 꿈같은 풍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길은 「하늘목장」 정상을 향하여 구비 구비 뻗어 있었다.

 

그날 행사가 진행되는 「어머니동산」에서는 뜻밖에 반가운 만남이 있었다. K시인이 미리 심어 둔 「예작 화살나무」와의 대면이 그것이다. 전국에서 모인 회원들은 갓 심어 앳된 생명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우리 나무 앞에서 무럭무럭 자라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큰 그늘을 만들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화살나무는 특이하게도 줄기에 코르크 날개를 달고 있다. 약재로 그 효능이 입증되었지만 어린 잎은 부드럽고 맛이 있어 봄나물로도 인기가 있다. 가을이면 이파리가 아주 곱게 물이 들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예작나무로 손색이 없다.

 

그 예작나무 옆에 마련된 천막 아래에서 공식행사가 이어졌다. 나의 순서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이름이 불려졌다. 준비 없이 있다가 선생님에게 갑자기 지명당한 아이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 나갔다. 소녀가 들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 나는 준비해간 『감자꽃』 몇 권을 내밀었고 소녀는 노란 들꽃다발을 내밀었다. 뒤편에서 수근거림이 들렸다.

 

“무슨 꽃이지?”

“냉이꽃이야, 나도냉이”

“꽃말이 봄색시라네”

 

 

 

나에게 있어 냉이는 추억의 맛이자 풍경이다. 엄마는 냉이를 뿌리 채 무국에 넣기도 하고, 콩가루에 버무려 데쳐 내기도 했다. 요즘은 엄마가 아니라 아내가 만들어내는 냉이 반찬을 먹지만 여전히 엄마표 냉이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 가득 번지면 봄을 온통 집안으로 들여놓은 듯 행복했다.

 

나도냉이꽃을 보니 냉이와 함께했던 소년시절이 다가온다. 학교 가는 길섶에도 냉이꽃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개구쟁이들에게 짓밟이면 그대로 낮은 자리에서 필 뿐 불평도 없었다. 내 유년의 냉이꽃은 그러했지만 대관령의 나도냉이는 귀한 꽃다발이 되어있다.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5월의 대관령. 여기저기 피어있는 나도냉이꽃은 유채꽃을 닮았다. 노란 색깔도 그렇고 여러 송이의 꽃들이 연이어 꽃대에 매달려 아래로부터 피어올라오고 있는 것까지 유채꽃과 흡사하다. 태초에 눈길한번 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도~냉~이~’라 소리친 것이 자기 스스로 이름을 짓게 된 경위인지 모르겠다.

 

2009년이었다. 잊고 살아온 세월 8년 전, 그때 이름도 정겨웠던 ‘눈마을도서관’에서 추억을 만들었다. 카페에 내가 쓴 졸작들을 올리면 댓글이 달렸었다. 나는 그 댓글에 또 답댓글을 달았다. 그러면서 뭔가를 기다리고는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시공을 뛰어넘은 그리움이었다.

 

대관령에 봄이면 돋아나는 나도냉이. 나도냉이 꽃다발을 내려자보며 생각하니 댓글의 주인공들은 바로 짙은 노랑의 마음을 간직한 봄색시였음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든다. 수줍음 타는 소녀 같은 그 봄색시가 어디엔가 숨어서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살펴보았다. 대관령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도 없다. 봄색시는 잘 지내고 있을까? 어쩌면 나의 무심에 대한 원망은 쌓아놓지 않았을까? 나도냉이를 닮은 노란 봄색시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지만 아무에게도 물지 못했다.

 

나도냉이 꽃다발을 받아들고 감격했다. 얼마만에 받아본 꽃다발인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하찮은 냉이꽃을 꺾어 선물할 생각이나 했을까. 도회지의 꽃집에서 사온 화려한 꽃이 아니라 대관령 골짜기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을 그냥 꺾어온 것이라 좋다. 꽃다발을 건네주는 아이의 풋풋한 눈빛 같아서 더 좋다. 나는 그 아이가 대관령에 피어있는 5월의 나도냉이처럼 착하게 웃음 지으며 성장하리라 믿는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부려본다.

 

나도냉이 피는 오월이다. 8년 전의 그 사람 오늘은 어디서 나도냉이를 바라보고 있을까? 돌아와 눈 감으니 대관령 바람 맞으며 피고 있는 나도냉이가 자꾸만 어른거린다. 내 가슴 속에 나도냉이가 자라고 있다.

 

대관령 기슭에 들꽃처럼 피었던

중년의 그리움 한 폭

 

오늘,

소녀가 전해준 나도냉이 꽃다발이

하늘공원 바람소리로 살아나서

노랗게 안겨오네.

 

가슴이 흠뻑 젖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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