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할딱고개

죽장 2017. 3. 23. 16:24

할딱고개

 

- 조명래

 

금오산에는 역사가 있다. 길재선생을 추모해 세운 채미정을 지나면서는 충신의 절개를 생각하게 되지만, 고산 황기로 선생이 쓴 ‘금오동학’을 지나면서는 선비의 풍모와 마주하게 된다. 왜적을 물리친 금오산성을 지나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생각하며 오르는 금오산 초입은 역사의 구간이다.

귀로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머리로는 이 땅에 살았던 선비를 생각하며 걷는 길도 잠시다. 거대한 물줄기가 천둥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대혜폭포에 이르면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역사는 사라진다. 물안개 속에 뜬 무지개를 바라보며 현실로 돌아온다.

폭포에서 왼편으로 꺾어들면 바로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한 발 한 발 내딛다가 다리가 뻐근해져 고개를 들면 급경사 계단이 하늘에 닿을 듯이 연이어 있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호흡을 가다듬고는 발을 내딛는다. 가쁜 숨이 턱에 닿을 무렵 마침내 돌출된 바위가 맞아준다. 산 아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그 곳을 사람들은 ‘할딱고개’라 부른다.

할딱고개란 경사가 매우 가팔라서 숨을 할딱거리며 오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한다. 경산방면에서 팔공산 갓바위에 오르는 길에는 내가 할딱고개라는 이름을 붙여준 곳이 있다. 주차장을 출발하여 포장도로를 십분 이상 걸으면 산길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급경사 길을 십 여분, 다시 돌계단을 십 여분 오르면 선본사 대웅전이 나타난다. 여기서 다시 한참을 오르면 갓을 받쳐 쓴 돌부처가 있는 관봉이다. 대웅전까지 오르는 가파른 계단 부분은 누구나 숨을 할딱거리며 올라가야 한다.

그날도 아침식사 후 물병 하나만 달랑 챙겨들고 나섰다. 계곡에 남아있는 잔설 옆에 배고픈 고라니 한 마리가 멈춰서 두 눈을 멀뚱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앞서 가는 사람의 다리만 보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선본사 절마당을 앞두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숨이 찼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이 계단 옆에 퍼질러 앉았지만 머리와 가슴의 통증을 참을 수가 없다. 눕히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하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올라온 길을 중지하고 내려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할딱고개 정상 아무데나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땀을 닦았다.

할딱고개에서 바라본다. 위로는 동봉을 지나 수태골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아래로는 조금 전 올라왔던 길 위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정신을 놓고 앉아 있는 잠시 사이에도 등 뒤로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간다. 나를 추월하여 위로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한 기원으로 소망을 이루라는 축원을 보낸다.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에게는 조심해서 내려가시라며 배웅한다.

오늘 숨이 막혀 주저앉았노라니 불현 듯 금오산 할딱고개가 생각난다. 금오산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그녀는 할딱고개에 사과나무가 있다고 했다. 어떤 날은 그 사과나무에 앉아있는 하얀 나비를 보았다고도 했다. 힘들여 올라와 닿은 할딱고개 사과나무와 사과나무에 앉은 나비를 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생살이에도 할딱고개가 있다. 난 지금까지 오로지 다가올 미래만 생각하며 열심히 올라왔다. 이제 할딱고개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수 천 년 역사가 스쳐간다. 필부로 살아온 삶의 구비길이 보인다. 멀고 힘든 길이었는가 하면 때로는 급류에 휘말려 위험했던 적도 있었다. 괴롭거나 허무했던 시간이 있었는가 하면, 달콤한 꿈만큼이나 행복한 사연들도 많았다. 그런가하면 마음 한편으로는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도전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도 다가온다. 또 올라가야할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비록 애국자가 아니지만 나라 걱정도 스쳐간다. 앞으로 펼쳐나갈 내 남은 생에 대한 궁리도 다가온다. 그러다가 과거와 미래를 접고 벌떡 일어서면서 한 생각, 나는 지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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