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치앙마이의 빨간 셔츠

죽장 2016. 11. 7. 15:28

      

 

  집을 나서는 순간이 여행의 시작이라면 가방을 꾸리는 과정은 여행의 에피타이저를 만드는 시간이다. 완벽하게 갖춰진 전채요리는 한 끼의 음식 맛 전체를 좌우한다. 나는 멋진 여행을 위하여 며칠 전부터 가져갈 물품들을 꺼내어 놓고는 오가면서 살펴보고, 생각한다. 빠진 것들은 즉시 보완한다. 다시 말하면 에피타이저의 메뉴에 빠진 것은 없는지 점검하는 일을 즐겨하고 있다. 미처 챙겨 나오지 못한 것이 있어 안타까워했던 경험에서 터득한 요령이다. 나는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된 에피타이저를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을 나서는 여행을 꿈꾸고 있다.

  에피타이저의 양이 많아 미리 배가 불러서는 안된다. 그래서 여행 가방은 가능한 가볍게 꾸리려고 노력한다. 골프가 목적인 이번의 경우에는 짐이 아주 많다. 여기에다 특별히 스케치북과 물감을 포함한 그림도구들까지 넣고 보니 짐이 상당하다. 그래도 내용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옷이다. 기온이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이라서 현지에서 입을 옷에다, 오가면서 입을 옷까지 보태니 더 복잡해진다. 더운 나라인 태국에서 여러 날을 보내는 일정인지라 아주 짧은 여름옷에서 부터, 제법 두꺼운 가을 옷까지 합한 후 들어보니 꽤나 묵직해진 가방이 되었다.

  사실 이번 여행은 현직에서 물러난 후 처음이다. 평생을 살아왔던 일상을 벗어나서 가지는 가장 큰 일탈인 셈이다. 체면도 벗어 놓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여행지, 그 곳에서 누리게 될 한없는 자유를 갈망해 온 터였다. 그 중의 하나가 평소 이런저런 이유로 입을 수가 없었던 옷을 마음 편하게 입어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젊음의 상징 빨간색 티셔츠였다. 이를테면 제대로 된 식사를 위하여 에피타이저에 그동안 숨겨왔던 빨간색 양념 한 가지를 추가한 셈이다.

현지에 도착해서 꿈꾸었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반바지에 물색 고운 티셔츠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서서는 마주보고 있는 사내에게 흡족한 웃음을 보낸 다음 샌들을 신고, 선글라스까지 끼고는 숙소를 나섰다.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렌터카 운전기사에게 큰소리로 “싸왓디 캅”(안녕하세요)을 외치면서 올랐다.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진 운전기사의 연분홍색 옷에 유난히 눈길이 갔다. 오늘은 어찌하여 야한 옷을 입었느냐며 농담을 걸었더니 의외로 심각한 반응이 돌아왔다. 자기네 국왕의 쾌유를 비는 뜻에서 이런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바깥을 내다보니 분홍색 계통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골프장의 캐디들도 하나같이 분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국왕의 건강을 염려하는 국민들의 진정성이 묻어났다.

  다음 날은 갑자기 온 세상이 침울 모드에 들어간 듯했다. 국왕의 서거 소식을 전하는 신문 방송은 물론이고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변해 있었다. 최대한 편한 복장을 하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검정색이나 흰색 옷을 입고 있다. 비지땀을 흘리면서 진정한 슬픔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국왕의 대형 사진 아래 흰 국화꽃으로 장식된 추모시설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가 하면 더러는 그들 방식으로 예를 표하고 있었다.

  그날의 저녁식사는 김치찌개가 곁들인 한식이었다. 반바지에 회심의 빨간색 셔츠를 입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아래 위를 살펴보았지만 이상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복장인 나를 왜 쳐다보는지 적어도 그때까지는 몰랐다. 자리에 앉자 안면이 있는 주인이 다가와서 ‘다른 도시에서 붉은 색을 입은 관광객이 테러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일러주었다. 그때야 내가 차려입은 옷이 문제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정신을 수습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사람들 모두가 적개심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때는 태국에 도착한 후 며칠이 지난 터라 향이 진한 ‘파타이’(닭고기를 넣은 볶음국수)와 바람에 날리는 ‘까오팟꿍’(새우 뽁음밥)에 식욕이 바닥에 닿을 무렵이었다. 현지 음식에 서서히 한계를 느끼고 있는 위장을 달랠 수 있는 모처럼의 만찬 기회였다. 어깨를 펴려고 입은 빨간 옷이 일순 죄수복의 무게로 전신을 누르는 꼴이 되었다. 서둘러 식당을 나서니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냄비 뚜껑 들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한참동안 뒤따라 왔다.

  작심하고 마련한 빨간 셔츠가 갑자기 무용지물이 되었다. 뜻밖에 발생한 상황으로 인하여 치앙마이에서 화려하게 펼치고자 했던 빨간 셔츠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빨간색까지 동원된 완벽한 에피타이저도 음식 전체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완벽한 준비가 성공의 조건은 될지언정 전부가 아님을 배운 기회였다. 순리에 따르며 맛과 멋을 쫒는 나의 다음 여행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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