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긴 밤, 짧은 생각

죽장 2016. 3. 8. 11:34

 

  깊은 잠에 빠져있어야 할 새벽에 또 눈이 떠졌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야 한다는 마음과는 달리 몸이 게으름을 부린다. 더 이상 견디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이기에 포기하고 일어났다. 살며시 일어나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다.

 

  일찍 일어난 아버지는 두어 번의 기침소리만 마당에 남겨놓고 들로 나가시고는 했지. 불빛의 밝기가 아니라 신체의 리듬으로 시간을 가늠하시는 듯 했어. 그 뿐 아니라 계절의 흐름도 훤히 꿰뚫고 있어서 꽃샘추위가 언제까지 지속되는지, 언제 씨감자의 눈을 오려서 심어야 하는지도 아셨지. 성품도 자상하셔서 늦가을 하루를 잡아 문짝에 창호지를 새로 바를 때는 단풍잎이며 대나무 이파리로 문고리 부근을 장식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생각난다.

  시계가 없어도 시간을 맞추셨고, 사계절의 흐름을 읽어 씨 뿌리고 추수하셨던 아버지. 연이어 닥치는 집안의 대소사에도 소홀함이 없었던 아버지의 몸은 요즘말로 슈퍼컴퓨터 그 자체였다. 한번은 예기치 않은 병충해 때문에 소출이 줄었다는 푸념을 들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자연에 해킹을 당한 경우였으리라.

  화장실을 다녀오니 정신이 맑아졌다. 서둘러 잠의 꽁무니를 잡을 생각은 않고 어두컴컴한 창밖을 바라보며 회상에 젖는다. 그래. 찢어졌거나 얼룩졌던 문짝들이 새 단장을 곱게 한 그날은 바깥이 보름처럼 밝았지.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이나 심지어 상가를 선전하는 형형색색의 불빛까지도 그 밝기가 초저녁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비슷하니 창밖에 보이는 불빛을 보고서는 시간을 알 수가 없다.

 

          기침소리만 남기고 들로 향하시던 새벽 발자국소리

          창호지를 발라놓고 허리를 펴시던 환한 미소

          낱알들이 튀기 전 콩타작을 서두르시는 부지런한 얼굴

          호롱불 아래 책 읽는 나를 바라보시던 굵은 주름살

 

  아버지도 내 나이 무렵 밤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렸을까? 그 때의 아버지보다 내 나이가 더 많으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긴 밤, 짧은 생각이 수 십 년의 시공을 헤매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몇 시쯤이나 되었을까? 바깥은 여전히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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