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못을 파는 시인

죽장 2016. 2. 26. 10:17

 

  팔공산에 가을이 한창인 날이었다. 직장에서 갓 퇴직한 K시인이 못을 파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직장생활 틈틈이 시만 지어온 사람에게서 들려온 이 생뚱맞은 소식이야말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괭이와 삽을 번갈아들며 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과, 그가 파고 있는 연못의 정경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난해한 퍼즐조각처럼 그림이 한 바닥으로 펼쳐지지 않았다.

 

  나이 쉰 한 살에 보길도에 발을 들여놓은 윤선도는 유배지의 한 골짜기를 막아 세연지를 만들었다. 당쟁의 물결에 휘말렸던 선비가 살았던 흔적이며, 그 분의 문학세계를 그리며 보길도에 갔던 것이 20년도 더 되었다. 또 한 번은 안동에서 진보를 거쳐 울진까지 가는 도중에 이정표를 보고 영양의 서석지를 찾았던 적이 있다. 나이 400살 은행나무가 주인처럼 맞아주었다. 돌담 안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가 자라고 있는 사우단이며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돌들이 솟아있는 서석지가 있었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오늘 못을 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보길도의 세연지가 떠오르고, 영양의 서석지가 꿈결처럼 다가왔다. K시인이 그 무렵의 윤선도와 같은 심정으로 못을 파고 있거나, 바위에 이름을 붙여가며 시를 읊었던 선비 정영방의 생애를 흉내 내고 싶었을까?

  윤선도는 당쟁의 희생물로 유배를 당했던 선비였지만 그는 굴지의 국영기업체에서 월급쟁이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자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제주도로 향하던 중 터를 잡게 된 곳이 윤선도의 보길도였다면, K시인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그 곳 골기와지붕 마당에서 아름드리 감나무와 함께 자란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요즘 세태를 살아가는 사람과 좀 달랐다. 직장생활 틈틈이 집 앞의 밭에 토란을 심고, 고사리밭을 일구었다. 그 옆에 희귀한 정원수들을 구해다 심었는가 하면 어디서 큰 돌을 옮겨와 세워놓기도 하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연못을 파고 있다는 곳으로 달려가 K시인을 만났다.

  연못은 그의 아버지가 농사를 짓던 밭머리에 위치해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서너 명이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넓적한 바위가 못 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땅 속에 묻혀있던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한다. 못에는 물이 제법 고여 있었다. 붕어와 미꾸라지도 구해 넣었다고 한다. 어리연에 수련까지 화분 채 옮겨놓은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침이면 토란 이파리에 이슬이 구르고, 저녁이면 반딧불이도 장단 맞춰 춤을 추겠지. 봄에는 고사리가 솟아오르고, 여름에는 연꽃이 피겠지. 팔공산 가을 단풍이 지고나면 나목 가지마다 백설이 쌓이겠지. 시인은 자신이 파놓은 연못을 들여다보며 멋진 싯귀들을 건져 올리리라. 혹시 아는가. 수태골에서 오우가나 어부사시사 못잖은 절창의 시편들이 탄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올는지-.

 

  돌아서는 나를 향해 심심하면 언제든지 놀라오라며 인심을 쓴다. 땅 한 평 없는 형편에 갑자기 못 하나를 얻은 듯하다. 못만 얻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떠있는 하늘과 구름 그리고 헤엄치고 있는 개구리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다. 팔공산을 넘어온 햇살이 금호강에 닿아 웃고 있다.

 

          고향을 버리고 너도나도 도회지로 나가는 세태

          사람들이 떠난 마을에는 빈집들만 늘어가는 데

          아버지가 일구던 밭머리에 못을 파는 시인이 있어

          오늘 그 작은 못가에 서니 세연지, 서석지가 부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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