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나에게도 고향이 있었지

죽장 2015. 9. 18. 22:33

  마흔 한 살의 도연명이 직장을 팽개치고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귀거래사’를 읊은 것이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이다. 굳이 도연명의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철이 든 이후 직장 따라 객지를 떠돌면서 나도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은 늘 향수의 대상이었다. 고향집에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고, 그 곳에 가면 지금도 함께 학교 다니던 친구들이 예전의 그 모습으로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일 뿐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젊어서는 자식공부 때문에 시골로 돌아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아이들이 장성하여 떠난 뒤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핑계가 나의 귀향을 강력하게 막았다.

그러나 때때로 일상의 삶에 회의와 권태가 심각하게 밀려들면 잠재되었던 나의 귀거래사가 불현듯 되살아나고는 했다. 막상 큰 용기를 내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는 또 반겨줄 부모도 없고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낼 전원도 없다는 또 다른 현실이 발목을 잡았었다.

 

  고향마을 앞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마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집들은 초가지붕에서 시멘트지붕으로 바뀌었고, 골목길이 약간씩 넓어졌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뒷산도 그때처럼 푸르고 앞 들판의 논들도 여전했다.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고향이 분명했다. 행인이 있으면 혹시라도 아는 사람은 아닌지 유심히 보았다. 작은 골목길에 접어들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생각났다. 풍경이며 사람들이 기억 속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여기 큰 살구나무 아래서 늘 군침을 삼켰었고, 저기 감나무에는 홍시가 탐스럽게 익어 갔었지. 날마다 동네 아이들이 모이던 공터며, 저녁마다 쏘다니며 놀던 골목은 그 모습 그대로다. 이 골목의 돌담길 입구에서 뱀을 만나 놀라 뛰어 들어갔던 앞집 마당 한편에 팔뚝보다 굵은 옥수수가 수염을 흔들고 있었지. 매캐한 모깃불 냄새와 함께 어둠이 내리면 지붕 위의 박이 달인 양 빛났어. 백설이 푸짐하게 쏟아진 날 처마에 달린 고드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고왔고, 구멍 난 양말을 신었던 그 겨울도 춥지 않았지.

 

  꿈이었다. 9월의 달력에서 추석이란 글자를 보면서 생각에 젖었던 것이 고향을 찾아가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오늘 아주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추억여행을 하였다. 마음을 가다듬어 사라지려는 꿈의 끄트머리를 다시 붙들어본다. 이 집 저 집,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사람은 달라도 머물고 있는 바람의 냄새는 그 시절과 같음을 확인하고 일어났다.

  꿈속에서 본 고향은 그 곳에 그냥 있었지만 몸과 마음은 너무 멀리 와 있다. 세월의 강물이 떠밀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내가 서 있음을 깨달았다. 나의 귀거래사는 오로지 꿈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고향은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올 추석에는 혼자서 조용히 고향에 다녀와야겠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완행버스에 몸을 싣고 출발하면서 단꿈에 빠져들고 싶다. 어떤 것을 보더라도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많이도 변했겠지. 동갑내기들 몇은 서둘러 저세상으로 가버렸지만 남아있는 녀석들도 주름살 가득한 늙은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추억 속에 남아있는 몇 장면은 회상할 수 있으리라. 혹시 골목을 오가는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면 어디 살던 누구라고 인사를 할 작정이다. 그러나 무너진 흙벽돌, 문짝 떨어

져나간 빈집에는 썰렁한 바람만 드나들고 있을지라도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것 같다.

 

[2015.9.17 경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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