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때 늦은 반성문

죽장 2015. 5. 16. 14:46

 

  어제는 경기도에 살고 있는 딸과 사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과 며늘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다들 어버이날이라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전화를 걸면서 잠시라도 부모에 대하여 생각했을 것이고, 나도 전화를 받고서 그런 아이들을 기특해 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휴대폰에서 ‘카톡!’ 하는 소리가 들려 열었더니 지인이 사진을 보내왔다. “야 이놈들아 어버이날인데 뭐 없냐?” 하는 현수막이 대로변에 걸려있는 사진이다. 누가 웃자고 걸어놓은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읽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행인들도 상당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며 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오월이 지나가고 있다. 좀 진부한 주제이긴 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은혜’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학생들에게 얘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림이 은혜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했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우여곡절을 겪게 마련이지만 인생길 고비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에게도 고마운 분이 계신다. 그 중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학급 내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나를 인정해 주셨고, 선생님을 향한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났다. 그런 마음 바탕 덕분에 소위 공부에 가속도가 붙어 멋지게 졸업하였다. 선생님이 너무도 고마워 스승의 날에는 꽃을 들고 인사를 드렸고, 설날에는 엎드려 세배를 올려온 것이 40여 년 세월이었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3년 전 이 무렵에 돌아가셨다. 발인제를 지내는 자리에서 준비해간 조사를 읽었었다. 살아생전에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오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음이 오로지 선생님 덕분이었다고 울먹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팝나무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눈부신 계절이 오면 나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돌아가신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부모님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내 자식 귀하고 장하다는 칭찬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 분들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식을 걱정하셨다. 나의 성장이 부모님의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나의 존재만으로 부모님의 자랑인 줄을 정말로 예전엔 미쳐 몰랐다. 어찌하여 고맙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파랗게 잔디 돋아나는 5월에 무덤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며 백 번, 천 번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 그래서 나는 지인들로부터 가끔 부모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잘하라는 말을 자신있게 한다.

  선생님, 그리고 부모님 영전에 때 늦은 반성문을 쓴다. “저는 지금 선생님에게 욕하며 달려들고 부모에게 눈을 부라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제 자식 공부 잘 못하는 것이 선생님의 책임이며, 물려줄 재산이 없는 것이 부모의 죄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봉양이 어려워 요양원에 모셨다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요즘입니다. 변하는 세상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뉘우치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뵙게 되는 기회가 주어지면 정말 잘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줄 알지만 반성문을 쓰고 나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진다.

  나도 물론 때가 되면 당연히 요양원에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의 일이지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이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라는 광고 카피가 와 닿는다. 그래서 40여 년 근무한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새로 시작한 것이 그림공부이다.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살게 될 터인데 뭔가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일주일에 하루씩 나가는 데, 시작하면 3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

  나는 푸른 오월 하늘로 때 늦은 반성문을 날려 보내면서 또 다짐한다. 모름지기 반성하며 살아야겠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나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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