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오늘 마신 커피

죽장 2016. 8. 17. 17:02

오늘 마신 커피

 

아라비카 향이 밀려온다.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박수와 환호성을 동반하고 밀물처럼 성큼성큼 다가온다. 전신을 감싸는 향기는 어제의 번잡한 일들을 잊게 하는 망각제이자, 앞으로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각성제이다. 어제는 사격의 진종오와 펜싱의 박상영이, 오늘은 양궁의 구본찬이 묵직한 금메달로 얹어 보내왔다. 나는 지금 리우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이들이 보내온 커피를 마시면서 눈을 감는다. 태평양을 건너온 브라질 아라비카 그윽한 향기에 젖어 신나는 아침을 맞이한다.

브라질에서 보내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브라질 커피를 생각한다. 오래 전, 커피의 맛과 향에 빠진 유럽인들은 커피를 독점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싹을 틔울 수 있는 커피열매의 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브라질 정부는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식민지 기아나에서 서로 견제와 반목하고 있는 찬스를 이용했다. 분쟁 해결을 핑계로 포르투갈 출신의 청년장교 파헤타를 파견하였지만 사실은 커피나무를 훔쳐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이쯤에서 한 모금 또 마신다.

임지에 닿은 파헤타 중령은 기아나의 프랑스 총독 관저 안방에 있는 올리비에를 찾았다.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남 파헤타와 정염에 몸이 익은 총독부인은 뒤엉켜 악마의 유혹을 맘껏 즐겼다. 둘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달콤한 사랑을 했다. 찬 커피를 마시면서 신맛을 즐기고 더러는 쓴맛도 즐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은밀한 시간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파헤타 중령이 임지를 떠나는 날 올리비에는 이별의 선물이자 사랑의 정표로 정성이 담긴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이 꽃다발에 곁들여진 커피나무 가지 하나와 몇 알의 커피열매가 브라질 커피 그 장엄한 역사를 만들었다.

남은 커피를 마시며 커피의 역사를 생각한다.

기원전 7세기경 에티오피아 염소 목동 칼디는 염소들이 흥분해 날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칼디는 염소들이 먹었던 빨간 열매를 입에 넣어 피곤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느껴짐을 확인하였다. ‘신의 선물’ 커피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칼디의 발견 이후 1,200여년 만에 브라질에, 다시 170년만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아관파천 당시 맛을 고종은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커피를 마신다.

지금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커피 생산국이 되었고, 브라질 커피의 작황에 따라 세계 커피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브라질커피는 생두과육을 제거하지 않은 채 건조하기 때문에 가벼운 산미와 함께 단맛이 풍부하다. 전체적인 밸런스도 좋으면서 선명한 쵸콜렛 느낌에 잘 익은 과일향도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커피잔의 바닥이 보인다.

내가 마신 커피는 최초 척박한 땅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염소 목동 칼디가 이슬람 수도승에게 전했던 신의 선물이다. 바다를 건너서 총독부인 올리비에와 바람둥이 애국자 파헤타 중령이 일심동체가 되어 총독관저 구중궁궐을 흔들었던 유혹의 몸부림이다. 오늘 아침 내가 마신 커피는 에티오피아산 염소가 먹었던 빨간 열매의 즙에, 식민지 기아나의 총독관저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달콤한 밀어로 반죽하여, 리우 올림픽 현장의 투혼으로 구워낸 위대한 정신이다. 오늘 아침 나는 우리의 장한 건아들이 만든 감동의 결정체요, 땀방울로 쌓은 드라마를 한 잔 마셨다.

[2016.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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