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7, 조선일보 만물상]
연꽃보다 부부
10만평 넘는 연잎의 바다가 초록으로 일렁인다. 그 위로 붉고 하얗고 노란 연꽃이 떠다닌다. 진흙탕이 피워낸 천상의 꽃이다. 그제 부여 궁남지(宮南池)에 갔다. 연꽃축제는 17일 시작하지만 백제 무왕 때 팠다는 궁궐 남쪽 못가엔 벌써 꽃 물결이 넘실댄다. 아침 여덟 시 연밭은 부지런한 사진 애호가들 차지다. 햇살 낮게 들고 사람 뜸해 사진 찍기 좋은 시간이다. 삼각대 늘어놓고 수려하되 고결한 '꽃 중의 군자(君子)'를 담는다.
▶예순 중반 부부도 밭둑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아내만 들었다. 남편은 아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뒤따른다. 아내가 멈춰 서 꽃에 빠져들 듯 렌즈를 겨누면 뒤에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 아내가 렌즈를 바꾸겠다고 하자 가방에서 꺼내 건넨다. 그 모습이 어색하기는커녕 아주 자연스럽다. 부부를 지켜보자니 절로 미소가 솟는다. 남편의 아내 사랑이 전해온다.
▶양평 두물머리 옆 세미원(洗美苑)도 연꽃 천국이다. 중년 남자가 수련 못 앞에 삼각대 세우고 한참 사진을 찍는다. 아내는 남편 곁에 서서 양산 높이 들어 뙤약볕을 가려주고 있다. 정작 자기는 여름 햇빛을 그대로 맞으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연밭에선 노부부가 눈길을 잡아당겼다. 허리가 90도 가까이 굽은 할머니 손을 할아버지가 꼭 붙잡고서 꽃길을 이끌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진감들이다.
▶어느 유월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만난 장면도 잊히지 않는다. 수련과 연꽃과 붓꽃이 모네 그림처럼 흐드러진 못가를 여든줄 부부가 천천히 다니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쭈그리고 앉아 윗몸 기울여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할머니가 뒤에서 남편 허리를 붙들었다. 할머니는 사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촬영 나들이의 동반자이자 보호자가 돼줬다. 나이 들수록 애틋한 게 부부의 정(情)이라더니. 눈부신 꽃 세상에선 부부 사랑도 새록새록 솟는 모양이다.
▶여행작가 이강이 쓴 청도 운문사 기행에 결혼 30년 만에 처음 여행 온 50대 부부 이야기가 나온다. 남편이 "자식 키우고 바삐 살다 보니 여행을 못했다"며 무안해했다. 그러자 아내가 기꺼이 말했다. "울 아저씨가 참말로 따뜻한 사람입니더. 숨이 막힐 때면 숨을 터주는 공기 같기도 하고, 답답할 때 바라보면 하늘 같기만 하지요. 그래 고생이 힘들지 않았어예." 작가는 고운 노을 아래 부부가 작은 트럭을 타고 떠나는 풍경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부부는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지어야 비로소 나는 새 비익조(比翼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