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무당벌레 소녀'

죽장 2014. 7. 4. 10:03

[2014.7.4, 조선일보]

귀 막은 어른들을 이겨낸 '무당벌레 소녀'

 

"한 움큼에 100마리 정도 돼요."

서울 개포고 3학년 이환희(18)양이 '무당벌레 시체들'이라며 내밀었다. 지난 5년간 모았다는 무당벌레 사체(死體)가 1000마리 넘게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었다. "지저분하게 왜 죽은 곤충을 모으느냐고요? 누군가는 무당벌레가 이렇게 많이 죽어간다는 증거를 남겨야 하잖아요."

환희양은 중1 때인 2009년 개기일식을 관찰하려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가 조명등 밑에 수북이 쌓인 죽은 무당벌레들을 발견했다. 이후 무당벌레 살리기 캠페인에 나섰다. 그리고 그렇게 5년간 꼼꼼히 정리해온 무당벌레 이야기를 담은 책 '죽지 마, 무당벌레야!'(명진출판)를 최근 펴냈다.


	5년간 무당벌레 살리기 운동을 펼쳐온 이환희양.
5년간 무당벌레 살리기 운동을 펼쳐온 이환희양. 인터뷰 내내 기말시험을 걱정한 영락없는 수험생이었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어요.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요. 환경운동을 하려면 중요할 것 같아요.” /김지호 기자
"무당벌레 한 마리가 평생 진딧물을 4000마리는 잡아먹는대요. 무당벌레가 없으면 해충을 잡으려고 살충제를 쓰게 되고, 그렇게 키운 채소를 다시 우리가 먹게 되겠죠? 옥상 조명등이 무당벌레를 유인하는 파장을 내뿜어서 뜨거운 줄도 모르고 날아가 앉았다가 타죽는 거예요."

하지만 '벌레 하나 죽든말든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는 어른들 생각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파트 주민회의에 찾아가 "무당벌레가 죽지 않게 조명등을 꺼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다들 냉담했다고 한다. "공연히 집값만 떨어지게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삿대질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무당벌레들의 죽음이 왜 조명등 때문이냐며 못 믿겠다는 어른이 대부분이었다.

"설득하려면 제가 더 많이 알아야 했어요. 한여름에 조명등이 있는 단지와 그렇지 않은 단지의 옥상을 돌아다니며 조사했죠. 조명등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당 하루에 60~70마리가 죽었지만, 없는 곳에서는 죽은 무당벌레가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환희양은 해법을 찾기 위해 여러 교수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정석 교수로부터 답신이 왔다. '조명등에 자외선 차단 소재로 코팅을 하면 무당벌레를 유인하는 파장을 없앨 수 있어요. 무당벌레를 꼭 살리길 바랍니다.' 한 페인트 회사에 연락하자 "마침 얼마 전에 자외선 차단 특수페인트를 개발했다"며 "새 제품 테스트도 할 겸 무당벌레도 살리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페인트 회사 직원 두 분과 아파트를 60동(棟) 넘게 돌며 조명등에 페인트를 칠했어요. 제 생각에 공감해주신 동네 어른도 몇 분 함께했죠." 결과는 성공. 페인트를 바른 뒤로는 죽은 무당벌레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환희양은 '무당벌레 소녀'로 통한다. 소녀가 5년 동안 무당벌레 살리는 일에 매달리니 아파트 단지에서도 그를 모르는 주민이 없다. "함께 무당벌레를 지켜주고 싶다면서 저한테 찾아오는 친구도 생겼어요. 자기는 지렁이를 살려보겠다는 친구도 있고요." 환희양은 지렁이든 무당벌레든 자신의 얘기를 듣고 공감해주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저도 나중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열댓 살밖에 안 된 제 말을 믿어주신 '착한 어른들' 덕에 무당벌레를 살릴 수 있었잖아요. 환경복원가, 패션디자이너, 유기견 보호자…. 저는 되고 싶은 게 많아요. 하지만 무얼 하든 환경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