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17, 조선일보, 허영한의~]
사진과 思惟, 그리고 文章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소설가 김훈의 명저 '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개정판에 실린 작가의 말에 의하면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로 쓸지, 조사(助詞)를 '이'로 할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은'은 주관적이고 신파적이다. '이'는 객관적이고
냉정하다.
전쟁 통에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섬에도 봄이 와서 꽃이 피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은'을 쓰자면 '섬은 버려졌고,
사람들은 흩어졌는데, 그래도 꽃은 또 피었고…' 하는 서러움이 묻어난다. 조사 '이'를 쓰면 난리는 사람들끼리의 일이고, 꽃은 그래도 핀다는
사실을 우선시한다. 객관은 엄중하고, 주관은 서럽다. 글의 중심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깊은 문장은 사유(思惟)에서 완성된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의 역할이 막중하다. (중략)
-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깊은 산중 굽잇길 볼록거울은 만물을 담지만, 거울 속 수많은 형상 중 무엇을 포착할 것인가는 촬영자의 몫이다. 조사(助詞) 하나에 문장가의 고뇌가 묻어나듯, 사진 속 작은 액자는 사진가에게 선택과 고민의 순간이다. /허영한 기자
(중략)
문장이건 이미지건 사람의 이성과 감성을 거친 산물은 온전히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통찰의 진수가 담긴 문장 하나에서 세상을 느낄 수도 있고, 풀 한 포기를 찍은 사진에도 명문(名文)같이 깊은 사유가 담길 수 있다. 치솟는 열정(때로 탐욕도 이를 사칭한다)이 더 이상 답을 구하지 못할 때, 사진 한 장 없는 오래된 책 한 권을 숙독(熟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의욕이 생긴다면 글을 공책에 따라 써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많은 생각이 따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