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그들이 가난한 조국으로 돌아온 까닭

죽장 2013. 2. 15. 14:56

[2013.2.15, 조선일보]

그들이 가난한 조국으로 돌아온 까닭

조선일보 선임기자 문갑식

 

미래창조과학부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창작'은 아니다. 47년 전 미래·창조·과학의 기치를 든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박 당선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지난 10일 창립 47주년을 맞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그것이다.

우리 근대화 역사를 보면 '국운(國運)'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병철이 전자, 정주영이 조선 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박 전 대통령이 야당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이 좋은 예다.

KIST가 생긴 유례는 더 드라마틱하다. 1965년 박 전 대통령은 미국에 갔다. 월남전 파병(派兵) 대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존슨 대통령이 뜻밖의 '선물'을 내놓았다. "종합 과학 연구소를 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과학기술 인력이 1000명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은 그로부터 굉음(轟音)을 울리며 역사를 바꿨다. 홍릉(洪陵)에 KIST가 들어선 것은 그 1년 뒤였다.

문제는 텅 빈 건물을 채울 '과학 두뇌(頭腦)'였다. 초대 원장 최형섭은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한국인 과학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가난한 조국은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1966년 처음 18명이 귀국했다. 귀국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198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276명, 1990년까지 1000명이 넘는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놀란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KIST의 재미(在美) 한국인 과학자 유치는 세계 최초의 역(逆)두뇌 유출 프로젝트였다!" 과학자 1000명이 부(富)와 명예를 버리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물론 애국심 때문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귀국한 과학자들은 당시 국립대 교수보다 세 배 높은 보수를 받았지만 미국에 있을 때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서울대 교수들이 반발하고 대통령보다 더 높은 월급에 놀란 관리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박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의 급여 명세표를 훑어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 시행하시오!" 편안하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자 과학자들은 몸을 던졌다.

서울 인사동의 한식집 선천에서는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노(老)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KIST 초기 멤버 40여명이 만든 '4월회'라는 모임에서는 역사가 채 기록하지 못한 충격적인 증언을 접할 수 있다.

"처음 귀국한 과학자 20여명 중 5명이 4년 만에 사망했습니다. 간암·대장암이었지요. 모두 30대였어요. 허허벌판에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스트레스… 오늘날 번영은 그런 희생이 바탕이 된 겁니다."(안영모 박사)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22대 원장인 문길주 박사는 1991년 귀국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KIST가 '그랜드캐니언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며 세계환경학회에서 이름을 떨친 그를 주목한 것이다. 고교 때 캐나다로 간 그는 한국말을 못하는 브라질 교민 출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귀국했다. 연봉 2000만원으로 미국에서 받던 5만달러의 절반도 안 됐지만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앞서 이 길을 택한 선배들이 있었기에 기꺼이 조국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서독에서 청춘을 바친 광부·간호사, 월남전에서 피 흘려 달러를 번 월남전 용사들과 함께 우리 역사에 기록돼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사실(史實)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래창조과학부는 미래·창조·과학은 간데없이 권한과 이권으로 가득 찬 '괴물'이 될 태세다. 나는 김지하가 썼듯 신새벽, 박 당선인이 아버지의 숨결이 살아있는 KIST를 찾아 미래·창조·과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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