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생각

은사, 사무치는 고독을 견디는 사람

죽장 2013. 2. 25. 16:04

[조선일보, 손철주의 옛그림 옛사람]

은사, 사무치는 고독을 견디는 사람

 

첩첩산중에 바위들이 덧나고 포개졌다. 늘어선 모습이 매우 사납다. 산은 살집을 다 발라내고 뼈다귀만 추려낸 꼴이다. 이것을 일러 '동골(冬骨)'이라 하니, 곧 겨울 산수화(山水畵)의 전형이다.

산 아랫도리에 꼽사리 같은 초가 세 채는 디귿 자 모양이다. 그곳에 딱 한 사람이 있어 오도카니 바깥을 내다본다. 그는 숨어 산다. 둘러싼 것은 오직 적막이다. 시간은 얼어붙었고, 세상과는 담을 쌓았다. 그러니 인간사의 옳고 그름은 아예 입에 올리지 않을뿐더러 눈썹 사이에 번뇌의 주름 따윈 생길 까닭이 없다.

몸서리치는 침묵, 은사(隱士)는 모름지기 그것을 견뎌야 한다. 인연도 끊고 관계도 벗어나야 숨어 사는 도리가 선다. 꽃 핀다고 부르고 술 익는다고 모이면 무늬만 은사일 뿐이다.

그가 더불어 지내는 벗은 대나무와 매화다. 보라, 보살핀 손길 없이도 자욱하게 자라나 추위와 맞서고 있다. 대나무의 절개는 새삼 들먹일 필요가 없다. 시인의 입을 빌려 대나무는 일찌감치 말했다. '내 기꺼이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벌과 나비를 붙들지 않으려 함이네.' 매화인들 뒤지지 않는다. 꽃이 피면 살결은 얼음이요, 뼈대는 옥(玉)이다. 하여도 매화꽃은 '암향(暗香)'이라 허투루 코에 닿지 않는다. 몸가짐이 은사를 빼닮았다.

'은사의 겨울나기' - 강희언 그림, 종이에 담채, 22.8×19.2㎝,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은 산수와 인물에 솜씨 좋은 18세기 화가 강희언(姜熙彦)이 그렸다. 그는 이웃에 살던 사대부 출신 대가인 정선에게 배웠고, 화원(畵員)이던 김홍도와 함께 붓 놀리기를 즐겼던 사람이다.

은사는 홀로 이루되 혼자 삼간다. 그림자조차 산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그림 속에 다리는 왜 그렸을까. 신라 문인 최치원이 읊은 시구(詩句)가 퍼뜩 떠오른다. '문밖에 난 한 줄기 길 가리키며 말하노니/ 잠깐 산을 벗어나면 길은 천 갈래로 나뉜다네.' 처신(處身)의 어려움이 이러하다. 머무름과 나아감이 다 녹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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