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채소밭의 아이들

죽장 2012. 11. 9. 10:07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체육관 남쪽 공터의 잡초를 뽑아내고 괭이로 여문 땅을 쪼았다.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의 얼굴에 불만이 묻어났다. 땀을 흘리는 이유를 모르는 아이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태도였다.

그럭저럭 작은 밭이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배추와 무 모종을 두 이랑씩 심었다. 뭐 이런 일까지 시키는가 하는 눈치였지만, 서툰 손으로 흙을 다독거리고 물을 길어와 주면서는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하는 김장용 무, 배추를 키워 본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대견스러움이 생기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이랑의 머리맡에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꽂는 것을 끝으로 첫날의 작업을 마쳤다.

그 날 이후 아이들은 다투어 경쟁이라도 하는 듯 날마다 배추밭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등교하면서는 곧장 밭으로 가서 눈인사를 하고나서야 교실로 들어갔고, 종례를 한 다음에도 밭으로 와서 무, 배추의 안부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가을의 한복판이 되었다.

배추의 이파리가 아이들의 손바닥 만해졌고, 무도 뿌리를 겉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무의 색깔이 특이하게도 고운 보라색을 띄고 있는 것을 알았다. 자기들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 무가 이른 바 ‘자색무’였던 것이다. 흔히 봐 온 배추와는 달리 보라색을 띄고 있는 자색무가 무척이나 신기하고 기특했다.

아이들의 관심 속에서 물주기는 계속되었다. 자기네가 주는 물만으로도 잘 자라고 있는 채소를 보면서 생명의 존귀함을 느끼게 되었다. 채소의 성장을 보면서 생각이 현실로 변해가는 과정을 알게 되었다. 배추이파리가 너풀거리는 하늘로 초록색 희망이 솟아올랐다. 흙에 박힌 자색무가 굵어질수록 보라색 꿈도 튼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배추와 무를 가지고 담은 김장은 세계가 놀라는 한국 음식이란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배추가 다이어트에 좋고, 자색무는 노화방지 효능이 있다는 것까지는 몰라도 좋다. 다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채소밭의 주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저희가 주는 물만으로 자라는 무와 배추를 보면서 감동을 받고 성취감을 느끼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을의 끝자락에 다달았다.

배추와 무가 잘 자라고 있는 채소밭머리에서 나는 욕심을 더 낸다. 아이들의 가슴에 배추보다 더 진한 초록의 꿈이 영글고, 저들의 미래에 자색무보다 영양가 더 많은 보라색 꿈이 실현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심쯤은 괜찮지 않을까. 가을 햇살 한 줌 내려앉은 아이들의 채소밭에 무지개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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