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기
사진과 친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카메라가 장착된 휴대전화를 하나씩 손에 들고 다니니 언제 어디서나 찍을 수 있는 것이 사진이다. 이렇게 찍은 사진은 개인컴퓨터에 저장해 두고 손가락만 까딱하면 언제나 볼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하여 보내고 받기 쉬운가 하면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수정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사진이 있어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최근 사진이 불편한 물건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놓은 사진을 어느 자식, 며느리도 가지려하지 않더라는 얘기다. 이른 바 사진이 애물단지가 된 셈이다. 그 자리에 동석해 있던 친구는 공감하면서 정신 있을 때 보관하고 있는 사진을 한 장씩 정리해야겠다고 한다. 사진을 기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사진 속 고인의 혼령이 손이라도 내밀까봐 그런 것일까? 사진을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여러 권의 사진첩을 보관하고 있다. 친구의 말처럼 나도 틈이 날 때 한 장씩 버려야 할지, 계속 보관할지를 생각해 본다. 사진을 버리면 즐겁고 씁쓸했던 추억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생각을 거듭해 보지만 사진기를 내려놓거나 보관 중인 사진을 버려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사진첩을 넘기면서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다름이다. 사진첩은 나의 소중한 재산이다.
하루는 사진첩을 뒤적거리다가 오래된 사진 한 장에 눈길이 꽂혔다. 아버지의 회갑연이 벌어지고 있는 시골집 초가 마당이 무대인 사진이었다. 중절모에 무명두루마기를 걸친 친척들과 마을 어른들이 어울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있다. 사진 구석자리에서 구경하고 있는 이웃집 코흘리개 녀석의 표정도 정겹기만 하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의 의미가 크다.
회갑날의 사진 속에는 가난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부모님이 웃고 계신다. 그 시절 돌담너머 오가던 이웃의 인정도 고스란히 살아있다. 어깨동무하며 뛰놀다가 코피 흘리며 싸우기도 했었는데, 세상 어딘가로 흩어져 소식 없는 친구들이 떠오른다. ‘어디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겠지’ 하는 유행가가 흥얼거려진다. 퇴색된 사진을 앞에 두고 회상에 젖었던 그 시간이 좋았다. 이렇게 사진에는 각각의 느낌이 스며있다.
나의 사진첩에는 저세상으로 가신 분들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여전히 청순한 소녀의 모습으로 있는가 하면, 장성한 아이는 헤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사진에는 고향과 젊음과 사랑이 그림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표면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진 속에 훨씬 더 많은 사연이 들어있다. 어쩌면 사진은 겉보다 속이 더 알차다.
사진은 순간을 영원하게 만들어주는 예술이지만, 나는 사진예술을 추구하는 전문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사진 찍기의 목표는 평범한 일상 중 마음 내킬 때 카메라를 들이대는 소박한 즐거움이 전부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사진 찍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나의 사진 찍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사진 찍기는 나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2013.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