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봄의 색깔

죽장 2013. 4. 4. 15:55

봄의 색깔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된다.

산수유, 생강꽃은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살금살금 다가와 손을 내민다. 제주도 산방산 아래의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유채꽃을 바라보며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골 집 돌담 사이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개나리꽃이며, 개나리꽃 그늘에서 땅을 헤집던 병아리까지도 봄으로 남아 있다. 개나리꽃을 피웠던 유년의 봄바람이 유채꽃 가득했던 중년의 벌판을 건너 생강꽃 핀 산허리를 넘는다. 봄은 노란색이다.

 

봄은 분홍이다.

지천으로 피었던 고향 뒷산의 진달래와 입술이 파랗도록 진달래꽃을 따먹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옆집 분이네 울안의 살구나무 고목에는 봄 마다 연분홍꽃이 피었다. 눈 감으면 살구꽃 같았던 분이 얼굴이 어른거리고, 눈을 뜨면 아파트 곳곳에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봄바람에 꽃비까지 맞으며 걷노라면 ‘연부운홍 치매가 보옴바람에 휘나알리이더라’ 하는 십팔번 가락이 흘러나온다. 봄은 분홍색이다.

 

봄이 어찌 꽃에서만 오랴.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면 연둣빛 이파리들이 밀려 나온다. 얼음 녹은 물에 정신 차린 버들강아지를 앞세우고 연둣빛 새움들이 합창을 한다. 돋아나는 이파리들은 모두 꽃보다 더 곱다. 버드나무 작은 가지를 비틀어 만든 버들피리를 들고 잔디밭에 누우면 흘러가는 구름도 한가했다. 소년의 꿈은 새싹 이파리를 보면서 성장하였다. 그때 불었던 버들피리 소리가 연둣빛으로 들려온다. 봄은 연둣빛이다.

 

봄은 무슨 색깔일까.

유채꽃 개나리꽃의 노란색과, 진달래꽃 살구꽃의 분홍색, 그리고 딱딱한 껍질을 뚫고 돋아나는 이파리 연두색이 서로 봄의 색깔이라며 다투고 있다. 개나리를 택하려니 진달래가 삐칠 것 같고, 진달래로 낙점하려니 서운해 하는 연둣빛 이파리를 달랠 길이 없다. 봄을 어찌 색깔 하나로 정할 수 있으랴.

 

노란색 분홍색 연두색이 모두 봄이다.

세 가지 색깔을 섞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희끄무레한 색으로 하자니 봄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렇다. 바람 신선한 아침나절은 연두색이고, 화사한 햇살 뜰에 가득한 한낮은 분홍이며, 뻐꾸기 울음 먼 산에서 날아드는 오후는 노란색으로 봄의 이름을 지었다. 파스텔톤 고운 색깔과 함께 하는 이 계절이 너무 짧다. 흰머리카락 늘어가는 아내와 마주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니 이월 하현달이 중천이다. 또 하루 봄밤이 속절없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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