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태풍을 거역하고 통영을 가다

죽장 2012. 9. 26. 16:09

태풍을 거역하고 통영을 가다

 

  제16호 태풍 ‘산바’가 오끼나와 남쪽에서 우리나라를 향해 북상하고 있다는 보도가 득달같이 날아들고 있는 날이었다. 몇 년 전 많은 피해를 입혔던 태풍 ‘매미’에 버금가는 초특급 태풍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래도 강행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초특급 태풍도 우리의 출발을 막거나 연기시키지 못했다. 회원들의 의지가 태풍과 정면으로 한판 붙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갓 기우에 불과했음을 금방 알았다. 어느 때보다 많은 참석 인원이 그랬고, 집행을 맡은 임원진의 잔손길이 스며있는 준비의 완벽이 그랬으며, 회원들의 성의가 넘치는 갖가지 협찬 상품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했던 것은 문학인으로서의 다짐이랄까,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2012 통영 문학기행』이었다.

 

  청마문학관에서는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외웠던 시들을 읽으면서 가슴이 따스하게 데워졌다. ‘꽃등인 양 창 앞에 한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로 시작되는 〈춘신(春信)〉이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행복〉을 대하면서 청마의 서정, 청마의 사랑, 청마의 행복에 한발자국 다가섰다.

 

  우리는 통영만이 내려다보이는 남망산 조각공원에 올랐다. 청마의 〈깃발〉과 초정의 〈봉선화〉가 음각된 시비는 회원들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붙들었다. 더구나 우리 선주문학회의 초대회장이었던 검솔선생의 시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던 참이어서 좋은 공부 자료가 되었다. 연필등대를 바라보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멍게비빔밥을 해치운 후 해발 461m 미륵산 정상으로 행했다. 케이불카 창으로 스쳐가는 초록의 산이며, 손에 잡힐 듯 말 듯 떠있는 무채색 다도해는 감히 이번 기행의 백미였다. 이어 박경리 문학관에서 가장 한국적인 대서사 〈토지〉와 마주했다. 문학관 앞뜰에 피어있는 홍접초에 다가선 얼굴들은 ‘평사리의 서희’를 능가하고도 남았다.

 

  태풍을 거역하며 다녀온 그날의 통영행이 눈에 선하다. 유치환, 김상옥, 박경리로 대변되는 통영의 문학이야 기본이지만, 그보다 태풍을 피해 내항으로 들어와 정박되어 있는 고깃배들의 웅성거림이며, 미륵산 정상에서의 안개비가 그랬다. 안개비에 젖고 있는 내 마음이 그랬다. 귀갓길에서 목청껏 외쳤던 즐거운 비명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맨발도 불사하고 뛰는 율동이 눈에 선하다. 문학을 잘 하면 다른 분야는 저절로 잘하는 것 같았다. 이보다 더 멋진 문학기행은 다시 있을 것 같지 않다.

 

 

                                                                                                 [20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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