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기차가 지나가네

죽장 2012. 9. 18. 13:58

기차가 지나가네

 

 

학교를 옮겨 출근한 첫날이었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때맞춰 기차가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어, 기차가 지나가네’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익히 봐온 아이들은 무심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씩씩하게 지나가는 기차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가끔 언덕 위에서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는 한다. 기차는 언제나처럼 기적소리를 앞세우고 달려온다. 맹렬한 기세로 공기를 밀고와 내 몸을 흔들어놓고는 획하고 달아난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고 바라본다. 기차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기적소리의 잔영은 한참동안 남아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기차가 산모퉁이를 돌며 새로운 풍경을 만나듯이 내 인생열차의 차창에도 갖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기차를 처음으로 타게 되었다. 이른 바 기차를 타고 유학을 간 셈이다. 유학지에서는 기차를 타야만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집에 올 수 있었다. 기찻길은 낯선 타향객지와 고향을 연결해주는 통로였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위하여 탔던 밤기차의 추억은 지금도 새롭다. 밤새워 달린 기차는 먼동이 터올 무렵에야 최전방 이름 모를 곳 어딘가에 나를 내려놓았다. 군복무를 마친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당당하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사나이로서 타지 않을 수 없었던 기차다.

어릴 때는 가족, 친구, 선생님과 함께하는 성장과 배움의 기차여행이었지만, 자라면서는 혼자서 외롭게 가야하는 길이고, 생면부지의 여객들과 함께 낯선 곳을 가야하는 인내와 적응의 여행이었다. 미지의 역을 하나씩 통과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던 나의 기차는 어느 듯 반환점을 돌아 출발지점으로 귀환하고 있다. 젊었을 적 내가 탄 기차에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희망이 동석하고 있었지만 요즘 나의 기차에는 종착지 도착을 앞둔 서두름과 후회가 달라붙어 있다.

 

기적소리가 들린다.

기차는 느티나무 자라고 있는 운동장 너머에서 달려와 나와 아이들 옆을 지나갈 것이다. 나는 인생의 종점을 향해가는 기차를 쓸쓸하게 보라보고 있지만, 아이들은 미래로 달려가는 희망의 기차를 바라보고 있다. 기차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내 앞을 지나고 있다.

'나의 수필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빨간 모자  (0) 2012.09.27
태풍을 거역하고 통영을 가다  (0) 2012.09.26
엄마 같다  (0) 2012.09.11
선비를 만나 염천 더위를 잊는다  (0) 2012.07.31
스승이 사라져가는 세상  (0) 2012.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