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를 만나 염천 더위를 잊는다
유래 없는 폭염이 지속되고 있다. 청사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싶다. 눈길이 먼저 닿은 곳은 설경이다. 어느 부지런한 사진사가 눈이 잔득 온 날 아침에 남 먼저 가서 찍었나 보다. 하단에는 금오산에서 발원되어 내려오는 개울에 가로놓인 다리가 있고, 난간마다 소복소복 눈이 쌓여 있다. 앞서 건너간 발자국 두엇을 따라 나도 다리를 건넌다. 채미정 활짝 열린 흥기문과 경모각이 일직선으로 보인다. 고목기둥은 말할 것도 없고 경모각 뒤편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나무 잔가지에 눈꽃이 만발해 있다. 눈 속의 풍경은 깊은 적막으로 가라앉아 있다.
저 언 땅은 시대를 바라보는 선생의 싸늘한 시각이지만, 백설은 선생의 순결한 마음이다. 백설을 헤치면 고사리싹이 봄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길재선생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돌난간 아래 얼음장 밑을 끊어질 듯 흐르는 물소리는 못난 우리를 꾸중하는 선생의 음성인지도 모른다.
다음 사진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중앙에는 선비 한 분이 한지 두루마리를 펴가며 뭔가를 붓으로 써내려가고 있으며, 의관을 정재한 선비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이를 지켜보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비롯하여 이날 진행될 행사의 각 순서마다 담당할 인물들을 의논하여 선정하고, 그 명단을 적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동향교의 석전대제에 헌관으로 초청받아 참여한 바 있다. 그날 나는 참석한 유림 선비들이 의사를 결정해가는 과정을 유심히 보았다. 이 분들의 복장, 언어, 행동들을 눈여겨보았다. 지금도 먹을 갈아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글씨들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어른들의 경건함이며, 일필휘지하는 엄숙함이 명륜당 누마룻장 아래서 올라오는 바람보다 차다.
서둘러 나서야겠다. 백설 뒤덮힌 채미정과, 향교에서 대제를 준비하는 사진에서 눈길을 거두고 나서면 선비들을 만날 수 있다. 채미정 앞을 흐르고 있는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역사의 향기에 젖게 되면 나도 ‘탁족하는 선비’가 된다. 시간을 600여 년쯤 뒤로 돌려놓고 생각에 젖어보는 것도 더 멋진 피서이다.
채미정에서 차를 돌려 낙동강을 건너면 백일홍으로 둘러쌓인 인동향교를 만날 수 있다. 명륜당 누마루에 올라 매미소리로 귀를 씻어야겠다. 정의롭고 인정이 넘치는 사회, 도덕과 미풍이 살아 있는 유학의 사회에 깊이 빠져들고 싶다. 눈 덮힌 채미정에 부는 충절의 바람이 인동향교 명륜당에 누마루에 둘러앉은 선비들의 도포자락을 감돌아 나오는 순간 염천 더위도 잊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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