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세계

어른 약자, 아이 약자

죽장 2012. 3. 21. 16:57

[2012.3.21, 대구신문 22면]

어른 약자, 아이 약자



  어느 날 우리 지역 Y요양원 원장 수녀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요양원에서 발간하는 홍보책자에 실을 원고를 청탁하는 전화였다. 처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사양했으나 연이은 간청을 끝까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 후 졸고를 보내고는 잊고 있었는데, 오늘 예쁘게 만들어진 책자와 함께 뜻밖의 선물 봉투(?)가 나에게 배달되었다.

  봉투는 밀쳐두고 책장을 넘겼다. 눈에 번쩍 띄는 문장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간호사 수녀에게 ‘애들은 몇이나 되느냐’고 묻는가 하면, ‘엄마!’라고 불러드려야 식사를 하는 어르신들을 생명처럼 섬기며 지낸다는 원장님의 글이었다. 재미있는 유머처럼 표현되어 있는 말씀을 읽으며 요양원의 일상적인 정경이 연상된다.

  요양원에는 백 명이 넘는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할머니와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 그리고 책을 들고 묵상에 잠긴 듯한 분이며, 화분을 내려다보며 혼잣말로 대화를 하는 분에서부터, 잘 가꿔진 정원을 산책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이 노인들을 친부모, 친자식처럼 보살펴주는 천사들이 있는 그 곳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어린 보살핌의 현장이다.

  봉투 속에는 만원짜리 상품권 석장이 들어 있었다. 동봉된 카드에는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주유소에서 기름이나 한번 넣었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다. 이것을 들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는다면 상당한 거리를 달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낸 분의 마음을 허공에 연기로 날려 버리는 것과 같지 않은가.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사람이 보내온 뜻밖의 선물이 더 반갑다. 받은 선물이 크고 화려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보내는 분의 정성이 담겨진 것이라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까지도 느낄 수 있다. 오늘 내가 꼭 그렇다. 받은 선물 봉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마음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일어섰다.

  상품권이 든 봉투에 지폐 몇 장을 더 보태어 넣고는 이웃에 있는 음료수가게를 찾았다. 그리고는 요양원 어른들을 향하여 자동차 가속페달을 밟았었다. 선물을 받은 기쁨을 되돌려 드린다고 생각하니 받았을 때 느낀 행복보다 더 큰 기쁨으로 가슴이 채워진다. 음료수 한 병으로 겨우 목이나 축이는 것이 전부겠지만, 그것을 받아들고 좋아하실 어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요양원에서의 풍경을 연상하는 나의 머릿속에 요즘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살펴보면 학교 안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많다. 병명도 생소한 희귀 난치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외갓집이 외국인인지라 우리말을 익숙하게 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상당수 있다. 엄마 아빠와 일찍 헤어져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내는 아이들과 당장에 점심 한 끼를 걱정해야하는 아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더구나 최근에는 동료나 선배들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의 문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불편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 아픈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진 사람, 건강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른 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변의 약자에게 눈길을 돌려야 한다. 진정성이 들어있는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어야 한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한다. 요양원 어르신들이 오래 오래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학교 안에 존재하고 있는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 생각이 겹쳐져 마음이 묵직하다. 요양원에서 생활하며 보살핌을 받는 분들은 어른 약자이고, 학교에서 갖은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들은 아이 약자들이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 같지 않다거나, 이게 누구만의 문제냐며 불평을 토로했던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창밖은 만물이 생동하는 햇살 따스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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